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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낙엽을 태우면서

by 언덕에서 2023. 11. 24.

 

 

낙엽을 태우면서

 

                                                                                             이효석(李孝石, 19071942)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새 날아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제일 귀찮은 것이 담쟁이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굴뚝의 붉은빛만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거들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은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히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족족 그 뒷시중을 해야 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자욱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게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띄운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허전한 뜰 한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에를 깊게 파고, 다 타 버린 낙엽의 재를―죽어 버린 꿈의 시체를―땅 속에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에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 태곳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나는 새삼스럽게 마음 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의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라, 늘 들어가는 집 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을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든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나 하고 멸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작은 일)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 가는 가을, 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사소한 일을 아름답게 설계하고 거기에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뜻을 발견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글이다. 이 글은 내용이 감각적인 표현과 비유적인 표현, 감미로우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를 통해 드러나고 있으며, 작자의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성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드러나는 일부 내용에 의해서 드러난 그의 귀족적인 듯한 생활자세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의 생활의 자세가 그 당시 일제 강점기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태도이기 때문이다. '백화점에서 원두커피를 찧어 오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색전등으로 장식하고, 스키를 시작해 볼까' 계획하는 이효석의 생활은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민족 전체가 굶주림에 빠져 있고,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지식인으로 대우받는 작가의 생각이 너무 없다는 부분은 타당하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 속에서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독립운동으로 죽어갈 때 문학의 순수성을 지향하며 현실과 괴리된 삶을 사는 지식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진정 순수가 무엇이며, 작가의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효석은 대학을 졸업한 뒤 1931년 이경원(李敬媛)과 혼인하였으나 취직을 못하여 경제적 곤란을 당하던 중 일본인 은사의 주선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지탄을 받자 처가가 있는 경성(鏡城)으로 내려가 그곳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경향문학(傾向文學)의 성격이 짙은 <노령근해(露嶺近海)>(1930) <상륙(上陸>(1930) <북국사신(北國私信> 등으로 대표된다.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 1932년경부터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아마도 이 수필은 그즈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거주지를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여름방학이 되면 온 가족이 함께 주을 온천에서 피서생활을 즐겼다고 하니, 당시 시대 상황으로서는 상당한 서구적이고 이국적인 취미를 지닌 현대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향토적 서정성과 상반되는 이효석의 이런 취향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메주 내 나는 문학이니, 버터 내 나는 문학이니 하고 시비함과 같이 주제넘고 무례한 것이 없다. 메주를 먹는 풍토 속에 살고 있으므로 메주 내 나는 문학을 낳음이 당연하듯, 한편 서구적 공감 속에 호흡하고 있는 현대인의 취향으로써 버터 내 나는 문학이 우러남도 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 메주 문학을 쓰든, 버터 문학을 쓰든 같은 구역, 같은 언어의 세계 안에서라면 피차의 명분이 유동되는 요소가 있을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렇듯 메주 문학과 버터 문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요리해 놓은 작가가 이효석이다. 그는 자연 속에 나타나는 인간 본능의 순수성을 서정적인 미학으로 표현해 내어 한국 근대 산문문학의 예술성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천재였다.

 물론 우리는 작가에게만 엄격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회적 책무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작가에게 더 치열한 의식을 요구하는 때인데 그의 글에서는 당시의 고민이 담겨 있는 그런 면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효석의 글에서 작가의 사회적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