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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노란 종이우산 / 남미영

by 언덕에서 2016. 1. 25.

 

 

 

 

노란 종이우산

 

                                                                       남미영 (1943 ~  ) 

 

 

 

 

 

 

 


 

 

 

 

 

 

한지에 콩기름을 먹여 만든 노란 종이우산이었다. 아버지는 손잡이 부분을 빙글빙글 돌려 우산을 활짝 펴주시며 말씀하셨다.

 "학교에 가다가 키 큰 어른이 같이 쓰자고 하면 안 된다고 하거라. 키가 너만한 아이는 같이 써도 좋지만."

 우산을 쓰고 골목길에 나오니, 가겟집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남자 어른이 껑충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가, 나하고 좀 같이 쓰자."

 "어른하고는 안 돼요. 키가 나만한 아이는 괜찮지만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허, 고거 참."

 어른이 혀를 차며 도로 추녀 밑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다시 나오며 말했다.

 "아가, 그럼 내 키를 이렇게 줄이면 되잖아? 이렇게 하면 너하고 똑같으닝께…."

 어른이 다리를 반쯤 접고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채 어기죽어기죽 걷기 시작했다. 꼭 오리 같았다.

 "아가, 우산이 무겁지? 자, 내가 들어줄게. 이리 다오."

 뒤뚱뒤뚱 몇 발자국을 걷던 그가 멈추어 서서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입술 위에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세요."

 나는 우산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몇 발짝을 같이 걸어갔을 때, 우산이 조금 높아지고 치마에 빗줄기가 들이쳤다. 그리고 또 몇 발짝을 걸어가자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어른이 어느새 접었던 다리를 쭉 펴고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키 큰 어른하고 우산을 같이 쓰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른은 우산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나는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뛰어야 했다.

 등에 짊어진 책가방 속에서 양철 필통에 부딪치는 연필 소리가 딸각딸각 들렸다. 새로 산 예쁜 연필이 곯는 소리가. 물에 젖은 인조견 치마가 종아리에 찰싹 달라붙어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연신 치마를 떼어내며 뛰어갈 때, 속눈썹에 매달린 빗방울들 사이로 세상이 보얗게 보였다.

 밤에는 감기에 걸려 몸이 펄펄 끓었다.

 "낮에 누구하고 우산을 썼지?"

 퇴근하신 아버지가 뜨거운 내 이마에 손을 얹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아기 커서 그런 어른 되지 말라고 선녀님이 보내신 사람이란다."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렇게 말씀하시며 나를 달래셨다.

 그 해 여름에 6·25가 터지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어른하고 우산 쓴 걸 그 때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을까? 그 사람은 정말 선녀님이 보내셨을까?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며 혼자 궁금해 하기도 하고, 혼자 미소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세월이 20년쯤 흘러가고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부모란 아기의 얼굴만 보아도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 수 있으며, 그 어른을 선녀가 보냈다고 하신 말씀은 내 어린 가슴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될까봐 그러셨던 것을.

 그리고 또, 세월이 한 10년을 더 흐른 후에 알게 되었다. 나도 그 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옛날의 그 우산대를 쥔 어른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무학(無學)이신 어머니가 신문을 읽다가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시면 무식하다는 말을 예사로 했고, 가난한 친척의 사정 얘기에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귀찮아했으며, 삼류 잡지를 보는 친구를 보면 한심하다고 핀잔을 주면서 마구 잘난 체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를 무식하지 않게 공부시켜준 분은 바로 그 무학이신 어머니였으며, 신문이나 잡지에서 너를 보았노라고 진정 반가워하며 전화를 걸어주어 어린 시절 옛정을 뭉클 느끼게 해주는 이들이 바로 그 친구들이었으며, 지금도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찾아와 소매를 걷어붙이고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는 이가 그 가난한 친척들이라는 사실은 깜박 잊고서.

 옛날 그 비 오던 날, 우산을 같이 썼던 그 사람은 정말로 아버지 말씀처럼 선녀가 보내신 게 틀림없나 보다. 

 

 

 


 

 

 

 

남미영(1943 ~ ) 문학박사.  숙명여대와 동 대학원 졸업. 196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 해송문학상 수상. 저서; 눈먼 천사. 아기 송아지, 아버지의 보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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