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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남자의 순정, 사랑과 상처 사이의 그 어떤 증상 / 유성용

by 언덕에서 2016. 3. 16.

 

 

 

 

남자의 순정, 사랑과 상처 사이의 그 어떤 증상

 

                                                                                   유성용

 

 

 

 

 

 

 

 

 

 

“아프면 남자가 더 아프지.”

 전라도 어느 지방도시의 조직을 이끄는 젊은 보스는 그렇게 말했다. 애인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다 물리고 어느 허름한 술집에 와서, 붉은 불빛 아래 고개를 푹 처박고 술 먹고 있었다.

 “왜 그 여자가 잘 못 지낸답니까?”

 “아니요, 어디서 잘 살아야겠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는 역시 깡패구나 했다. 깡패들은 본디 소통하지 않고, 혼자서 마음먹고 감당한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대화하지 않고 넌 내 친구고, 넌 내 애인인데, 어찌 애인의 안부를 알까.

 내가 아는 한 부산 청년은 중학교 중퇴를 하고, 어려서부터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그 때 같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를 만나 동거를 했다. 한데 그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고 그는 버림을 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도 안 되었던 때다. 한데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또 같이 살았다. 그런 일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일하던 술집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술집에서 일하는 여종업원을 손님이 강제 추행하려던 것을 보고 그가 나서서 말리다가 맥주병에 찢어져 큰 상처가 나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때 그 여자가 경찰서를 찾아와, 저년이랑 어떤 사이냐며 난동을 쳤다. 그런 일이 잦았다. 아직 스물도 안 된 이 남자는 그 여자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여자를 믿지 않았다. 그는 멋진 수컷이다. 몇 번의 상황을 겪고 배움이 생기면 그 원칙을 별 회의 없이 끝까지 잘 지켜나갔다. 간간이 연애를 하지만 그것은 그냥 연애였다.

 

 가을날 색색으로 나뭇잎들은 물들었다. 여름철 초록빛 푸른 동색 뒤에 숨어 견딘 마음들이 죄다 증상으로 피어났다. 계수나무와 은행은 노랗게, 목련과 호두나무는 갈빛으로, 그리고 단풍나무는 대놓고 붉게. 순정이란 어찌 보면 그런 증상 같은 거다. 사랑과 상처 사이, 그 어디쯤에 기생하는 증상, 말하자면 순정은 사랑 같기도 하고 상처 같기도 한 마음이다. 이제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마음은 얄궂다. 나이를 먹으면서 스스로 세속화될수록, 그 반대편에서 순정의 증상은 더욱 사적으로 은밀하게 제 속에서 고매해진다. 세속화된 수컷들일수록 홀로 애틋하게 떠나간 애인을 순정으로 간직한다.

 

 영화 「지중해」가 생각난다. 군인들이 전쟁도 모르는 어느 평화로운 섬에 들어섰을 때, 그 섬에는 매혹적인 처녀 하나 살고 있었다. 군인들은 사랑에 빠져 어느 순간 모두 무장 해제되고, 무기들은 그 섬에서 온데간데없어졌다. 한데 사내들이 그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 오직 한 사내만이 그 여자와 잠자리를 갖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제 사랑은 순정 속에 있다며. 하지만 그 순정이 커갈수록 섬에는 다시 문제가 들끓는다. 어느 사이 사라졌던 총들이 다시 나오고, 그 섬의 평화는 일순 다 망가졌다.

 

 순정이란 자고로 연약한 마음이 아니라, 들끓는 닫힌 욕망의 체계다. 순정은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한 극진함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제 속의 이유로 그 사람을 독점하려는 욕망이다. 심지어는 그 욕망이 저지당하고 명백하게 그 끝을 보았을 때조차, 남자는 저 홀로 상처를 끌어안고 사랑의 끝을 모른 척하며, 여전히 제 속에 갇혀 사랑을 고수한다. 상대도 없고, 자신의 무너짐도 없이 오직 거울 속에 갇혀 홀로 사랑하는 일.

 

 남자들아, 함부로 제 속에서 순정을 길어 올리지 마라. 순정은, 이토록 사랑과 상처 사이에 기생하며 꿈틀대는 그대의 증상에 다름 아니니. 증상으로나마 제 욕망을 누리려는 마음은 더없이 쓸쓸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생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같이 증상 아닌 것들이 있을까. 어찌 보면 증상이라는 것도 다만 살아있는 동안의 체험일 것이다.

 

 그 증상이 다하면, 색색으로 물들였던 나뭇잎들처럼 슬픔도 없이 다 져 내리니.

 

 - 유성용 저 『생활 여행자』 103 ~ 105쪽

 

 

 


 

 

 

 

 

 

유성용 : 1971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3년간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지냈다. 그 뒤로 4년간 지리산 화개와 악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맹물 같은 수제 덖음 녹차를 만들며 글을 썼다. 훌쩍 중앙아시아 오지로 날아가, 파키스탄, 티벳, 인도, 네팔, 스리랑카 등지를 1년 6개월간 홀몸으로 뚜벅뚜벅 돌아 다녔고, 2005년 귀국했다.

 'EBS 세계테마기행' 멕시코 편과 이란 편의 큐레이터로 참여하였으며, 『Paper』와 '한겨레신문'에 '스쿠터 전국 다방 기행' 등을 연재했다. 저서로는 『여행생활자 -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 『생활여행자』『다방기행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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