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100편 감상

동물들은 모두 서정시인 / 최재천

by 언덕에서 2016. 3. 23.

 

 

 

동물들은 모두 서정시인

 

 

                                                                         최재천(1954 ~ )

 


 

 

 

 

 

 

 

 

 

 3월 21일은 ‘세계 시인의 날’이다. 지난 세기가 저물던 1999년 제 30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제정했다.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파리를 비롯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시 낭송회가 열린다. 평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시 한 편 읽을 여유조차 갖기 어려운 생활이지만 시의 날이라 하니 나도 모르게 시집에 손이 간다. 요즘 참 아름답고 좋은 시들이 많이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읽는 이들이 너무 적은 것 같다.

 동물도 과연 시를 쓸까? 시란 “자기의 정신생활이나 자연, 사회의 여러 현상에서 느낀 감동이나 생각을 운율을 지닌 간결한 언어로 나타낸 문학 형태”라는 어느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른다면 나는 이 세상 거의 모든 동물들이 다 시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봄이 되어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저마다 목청을 가다듬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수새들은 다 영락없는 서정 시인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운율이나 자수가 일정한 정형시를 쓴다. 시인마다 느낌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종에 속하는 수컷들은 모두 똑같은 틀에 맞춰 시를 쓴다. 유전자의 지시에 따라 시의 길이도 정해져 있으니 그들의 시는 어쩌면 시조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는 시라기보다 음악, 그 중에서도 기악곡이라 하는 편이 더 옳겠지만, 어차피 음악과 시는 뗄 수 없는 사이가 아닌가. 풀벌레들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인은 단연 귀뚜라미일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 시를 읊는 것이 아니라 윗 날개를 서로 비벼 사랑의 시를 읊는다. 한쪽 날개의 표면에 마치 빨래판 또는 손톱을 다듬을 때 쓰는 줄과 같이 오톨도톨한 부분을 다른 날개의 가장자리로 문지르며 음악을 연주 한다. 그리도 단순한 악기를 가지고 어떻게 그처럼 화려한 연주를 할 수 있는지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귀뚜라미라면 그저 ‘귀뚤귀뚤’ 우는 놈들만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들의 음악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의 귀뚜라미들이 사는데 그들이 구사하는 시어만 들어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다.

 시인마다 제가끔 자기만의 시운(詩韻)이 있다. 특별히 화려한 귀뚜라미 연주를 듣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늦은 여름밤 서울대 교정으로 초대하겠다. “호르르르륵 호 호 호”하는 왕귀뚜라미의 연주가 꾀꼬리 뺨친다. 밤늦게 그들의 음악을 배경으로 연구실에 앉아 있노라면 “방에는 글 읽는 소리, 부엌에는 귀뚜라미 소리”라는 우리 옛 속담의 평화로움이 내 온몸을 적신다.

 귀뚜라미와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인 여치와 베짱이들은 날개의 가장자리를 뒷다리로 긁으며 역시 화려한 서정시를 쓴다. 뒷다리 안쪽에 작은 돌기들이 줄지어 나 있는데 그걸 긁어 소리를 만든다. 돌기의 크기와 수는 물론 그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느냐에 따라 음정과 박자가 달라진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대나무로 엮어 만든 작은 우리 속에 여치를 넣어 파는 장사들이 광화문 네거리에도 있었데, 이젠 그들의 시 낭송회에 참가하려면 차를 타고 한참 외곽으로 가야 한다.

 같은 곤충계 시인인 매미는 좀 요란한 시를 쓰는 편이다. 귀뚜라미와 베짱이가 현악기를 사용한다면 매미는 타악기를 두드리기 때문이다. 그 작은 공명기로 어떻게 그처럼 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할 뿐이다. 음향공학을 연구하는 한 동료교수는 틈만 나면 내게 매미를 연구하여 신개념의 스피커를 만들어 특허를 내면 떼돈을 벌 것이라고 부추긴다.

 그런가 하면 개구리, 맹꽁이, 두꺼비들은 관악기를 분다. 소리주머니 가득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서서히 내 뿜으며 사랑가를 부른다. 관악기 중에서도 특히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와 가장 흡사하다. 매미도 그렇지만 개구리 등도 독주보다는 합주를 더 즐긴다. 좀 더 크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냄새도 시어가 될 수 있는지 모르나 자연계 거의 대부분의 시인들은 사실 다 냄새로 시를 풍긴다. 언뜻 생각하기에 소리에 비해 냄새는 단순할 거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 냄새를 일으키는 물질의 화학구조를 들여다보면 <오감도>를 뺨칠 정도로 난해한 시들이 적지 않다.

 인간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동물계의 시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 수컷들이다. 동물들의 시낭송에는 시인은 모두 남정네들이고 듣는 이는 모두 여인들이다. 하지만 나방들은 예외다. 암 나방들은 동물계에서 아주 드물게 보는 여류 서정 시인들이다. 절대 다수의 나방들에서는 특이하게도 암컷들이 냄새를 뿌리고 수컷들이 그들을 찾아다닌다. 그 여류시인들의 가냘픈 시를 아주 먼 곳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수나방들은 모두 기가 막히게 잘 발달된 안테나들을 달고 다닌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거의 필연적으로 쇠퇴한다.”고 개탄했던 19세기 영국의 사학자 머컬리 경의 말처럼 인간과 침팬지 등 대부분의 영장류들의 대화에선 시어 찾기가 쉽지 않다. 간결한 언어로 그 깊은 속뜻을 전하는 낭만은 다 어디 가고,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어지러운 산문만 쏟아내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동물생태학자, 대학교수,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학자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번역하여 국내외 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1995년 이래로 시민단체, 학교, 연구소 등에서 강연을 하거나 방송출연, 언론기고를 통해 일반인에게 과학을 알리는 작업을 해왔다. 1953년 강원 강릉에서 4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고향의 산천을 찾았다. 1979년 유학을 떠나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생태학 석사학위, 1990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하버드대 전임강사를 거쳐 1992년 미시간대의 조교수가 됐다. 1989년 미국곤충학회 젊은과학자상, 2000년 대한민국과학문화상을 수상했고, 1992-95년까지 Michigan Society of Fellow의 Junior Fellow로 선정되었다.

'수필 100편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엽을 태우면서  (0) 2023.11.24
감사 / 임옥인  (0) 2017.04.19
남자의 순정, 사랑과 상처 사이의 그 어떤 증상 / 유성용  (0) 2016.03.16
슬픔의 냄새 / 이충걸  (0) 2016.03.09
침향(沈香) / 정목일  (0) 2016.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