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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슬픔의 냄새 / 이충걸

by 언덕에서 2016. 3. 9.

 

 

 

 

 

슬픔의 냄새

 

 

 

 

 

<사진 출처 : 가실님의 블로그(http://blog.daum.net/leefall0820)>

 

 

 

 

                                                   이충걸

 

 

복사를 하려다 통증을 느꼈다. 페이퍼 컷이었다. 나는 상처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렸다. 실 같은 핏자국이 비쳤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파열된 혈관은 수선하는 메카니즘이 금방 가동되겠지. 그러니 필요한 건 시간이다. 모든 치유 과정은 그렇게 면역 체계를 가지고 같은 ‘용의자’의 재공격을 막아주는데, 왜 상처가 아물었던 자리엔 언제나 옛 상처를 대신해서 새로운 상처가 돋는 걸까?

 퇴근을 하고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달리기를 마쳤을 때처럼 체온이 올라갔다. 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의 하얀 껍질을 밟고 멈춰 섰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휩쓸린 기억은 남아 있지만, 어쨌든 순환 속에서도 맞이하고 또 떠나보낸 겨울 속에서 나는 나이를 먹었다. 날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하지만, 주춧돌 위에 세워진 조각상처럼 거룩한 위인이 되고 싶지도, 누군가 날 위해 서사시를 써주거나 광장에 내 이름을 붙여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다른 규범에 맞추기 위해 내 삶의 일부를 포기한 적은 없다. 고리타분한 루터교1 집안사람처럼 살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 얼굴은 그 교통사고가 있기 전으로 회복되지 못했다.

 

 그녀의 생일날, 나는 그녀에게 건넬 작별 인사를 고르고 있었다. 생일선물로 필요하다면 나는 잘게 으깨진 유리 한 상자, 떨어진 국화잎들, 그리고 먼지까지도 준비할 예정이었다. 크레디트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는데, 난 자꾸만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잇몸을 드러내며 귀밑까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의 살찐 손을 잡자 여름 오후의 시든 냄새가 밀려왔다. 난 하필 그녀가 선물했던 이브 생 로랑 오피엄을 뿌린 채였다. 내 손목과 귓바퀴에는 뭔가 유한계급이 살롱 안에서 빈둥거리던 시절을 상기시키는 냄새가 났다. 타이밍이 나빴다. 남자와 헤어진 더운 날, 몸에 여전히 남아있는 남자의 뭉개진 향수 냄새를 묻히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은 얼마나 구역질날까? 내가 원했던 건 내 어깨를 누르는 무게를 들어 올려준 다음 숨쉴 만한 작은 공간을 마련해 주는 향수였는데, 결국 그녀는 그 향수를 멕시코의 남자 매춘부에게서 나는 냄새로 기억하게 될 거였다.

 그녀는 구두를 사달라고 했다. 우리는 흔하디 흔한 명동의 구두 숍으로 갔다. 여자의 구두를 골라주면서 이별의 말도 함께 고르는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일까. 그녀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갈색 펌프스2를 골랐다. 그녀의 감식력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나는 카드를 꺼냈다.

 70년대식 다방엔 팬 위를 노끈 같은 더께를 감은 선풍기 두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플라스틱 화초들이 수족관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 놓인 게 가을꽃처럼 반짝이는 오렌지색 에르메스3 쇼핑백이 아니어서 미안했다. 오랫동안 바라던 캘리백4을 갖는 것과 이별의 쓴맛을 비교할 순 없다. 그러나 새로운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이 취미인 손가락으로 불룩한 내셔널 브랜드의 쇼핑백 표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귓불은 익은 토마토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어떤 선언을 하는 게 폴터가이스트5(poltergeist)에게 접근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돼가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더웠다.

 

......사냥꾼의 헤드라이트에 놀란 작은 짐승 같은 눈이 나를 보았다.

 “먼저 나갈게.”

 5분이 지났다.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되돌아갔다. 그녀는 누선이 헐거워진 눈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일어서자 핸드백 끈에 매달린 설탕 알갱이만한 스팽글6들이 반짝거렸다. 순간 그녀가 사랑해, 라고 말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온전한 정당함은 그녀에게 양보하고 내가 얻는 배덕자라는 레테르에 만족해야 했다. 우리는 이별의 통계 위에 덧붙여진 남자와 여자였다. 물론 이별 자체는 통계가 아니라 개인의 일이지만.

 이제 가자고 내가 말했다. 피의자의 권리를 읽어주는 듯 연민 없는 내 어조에 나조차 놀랐다.

 트리트먼트가 잘 되지 않은 진한 벌꿀 빛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그녀는 앞서 걷고 있었다. 재켓을 벗어 든 그녀의 뒷팔에 자잘한 돌기가 잔뜩 돋아 있었다. 난 앞으로 30년이 넘도록 모욕을 받는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녀가 내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그녀만 알고 있는 리듬에 따라 내 재킷 주머니에 뭔가를 집어넣었다.

 캘빈클라인7의 이스케이프 포 맨이었다. 그녀가 선물한 두 개째의 향수. 따스한 잔디밭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 위험이 없는 모험, 프로방스 지방에서 즐기는 피크닉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었다.

 이스케이프의 마법은 종종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게 한다. 도망친다는 것. 그 소량의 값비싼 관념. 그녀에게 도망치려고 하는 내가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유품을 나눠 받기라도 한 듯 엄숙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모든 게 나에겐 허튼 막간의 일부였다. 더 성숙된 인간이 되기 위한 힘든 결정도 없었고, 완전히 망가진 적조차 없었다. 수치를 느끼면서 나는 돌아섰다. 순간,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라기 보단 안정감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목구멍까지 치솟았고, 잘 있어, 라는 말을 내가 실제로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슴 아픈 후회가 밀려왔고, 어떤 필사적인 노력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자동차는 멈추었는데, 나는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다. 물리의 법칙을 어긴 것처럼, 모든 것이 중력의 법칙을 따르지만, 중력은 사랑에 빠진 이들에겐 책임이 없다고 말한 것은 아인슈타인이었다.

 

 ...... 통증을 느끼며 나는 누워 있었다. 얼굴엔 각목 같은 살색 거즈가 두둑하게 붙어 있었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 낚아챌 듯 떠올랐다. 그러자 어리둥절하면서도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자 조련사처럼 내 주위를 도는 의사를 불렀다.

 “꼬맸어요.”

 그가 말했다.

 “저, 프랑켄슈타인 같아요?”

 “거울 볼래요?”

 의사의 목소리 톤이 지나치게 한결같아서 밥 먹었느냐고 묻는 것처럼 심심하게 들렸다. 그래도 거울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내 팔로 백옥자의 투포환을 던지는 것만큼 힘들었다.

 “자동차에 부딪혔어요.”

 의사가 신중해졌다.

 “기분이 어때요?”

 나는 편안하게 대답했다.

 “죽고 싶어요.”

 왼쪽 얼굴에 몇 바늘 꿰맸을 뿐이다. 별것 아니었다. 나는, 낙관과 현실의 중간을 서성거리며, 내 얼굴에 전깃줄처럼 엉켜 있는 살색 테이프를 만져보았다. 신경 끝에서 끝으로 충동을 전달해주는 세포의 확장관이 영구히 절단돼 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찢겨진 얼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두렵진 않았다. 친숙한 행위를 마친 것 같기도 하고, 노름판에서 진 빚을 갚은 기분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다만 더 이상 꿰맨 얼굴로는 배우가 되진 못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났다. 나는 필요할 때만 이스케이프 향수를 뿌리면서 자책이 주는 감미로운 슬픔을 느끼곤 했다. 바닥까지 다 비웠을 때, 나는 마개를 단단히 닫아 옷장 속에 간직해 두었다. 그녀가 떠날 때, 그녀에게서 압류해 온 이기적인 냄새가 오랫동안 나에게 가책을 요구하도록.

 

 

 

 

 

이충걸(1963 ~ ) 출판인 및 작가. '이충걸 매니아'라고 불리는 계층이 있을 만큼 독특한 문체로 유명하다. 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쉬즈, 행복이 가득한 집, 보그 등에서 기자 및 편집자로 일했다. 2001년부터 GQ KOREA 편집장을 맡고 있다. 해를 등지고 놀다(도솔, 1999년), 어느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디자인하우스, 2002년), 슬픔의 냄새(시공사, 2004년),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미처 탐구되지 않았던 쇼핑에 대한 뜻밖의 기록(위즈덤하우스, 2008년), 완전히 불완전한(생각의나무, 2011년), 소울푸드(청어람미디어, 2011년 (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작가가 2004년경에 펴낸 ‘마흔 가지 이별의 방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슬픔의 냄새』라는 책의 표제작이다. 수필집으로 알고 읽었는데 몰입해 읽으면서 보니 소설 같기도 하고 장시로도 느껴져서 매력적인 작품집이었다. 애인과 헤어진 남자는 슬픔을 느끼는데 그 슬픔이 냄새로 표현된다면 어떤 냄새라는 것을 매우 독특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나’는 참을성 없어 보이는 캐릭터지만 뜻밖의 사회적 지구력을 보이며, 기사의 룰을 깬 독창적인 문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낮선 이미지와 생경한 언어들을 조합한 그만의 독특한, 때로는 불편한 조임까지 주는 ‘이충걸’적인 글쓰기는 매니어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10년 전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글을 쓰게 된다면 이 책의 저자처럼 개성있게 써보리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책의 서두에는 소설가 ‘배수아’의 추천의 글이 나온다.

 

(전략)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그를 모른다는 점이다. 거기에. ‘전혀’라는 강조어를 삽입해도 전혀 틀리지 않는다. (중략)

 내가 이 책에서 읽은 것은 그와 그의 간접적인 사물들의 모습이었다. 깊이 모자를 눌러쓴 채 안개 속에서 다가와 손을 내밀고, 포옹을 하고 사라져가는 무수하고도 영원한 그림자의 사물들 말이다. 책 속의 그는 고독의 에피소드를 사는 사람이다. 그 에피소드들은 그를 더욱 구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해변의 흰 모래처럼 반사시킨다.

 그리하여 마치 모자를 쓴 사람의 뒷모습이 목소리만 남기는 것처럼, 세상은 그의 발걸음과 표현 속에서 거리감을 둔 간접적인 것으로 되살아난다. 그 거리는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고 性의 구분도 무의미하게 한다. 독설과 연민이 넘치는 그의 문장은 또한 지독한 메타포의 세계이다. 독자들은 분명 그 속에서 헤엄치게 되리라. - --- 배수아 (소설가)

 

 

 최근 몇 년 동안 한글로 쓰인 작품 중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소설이 배수아씨의 소설이었다. 그녀의 소설집을 다섯 권이나 책꽂이에 두고 있는 상태이고 대부분 다 읽었는데 아직도 서평 한 줄 쓸 수가 없다. 특이한 글을 쓰는 배수아 작가가 칭찬하는 글이니 읽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위의 작품은 기존 작가에게 느낄 수 없었던 독창적인 문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은 회상과 상상에 의한 '스토리'라기보다는 그 스스로 정체성을 부여한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그의 글감이 되는 사물이란 단번에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이상한 언어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은,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슬픔의 냄새』는 남들보다 몇 곱절은 만남과 헤어짐이 잦은 남자가 기억의 그물을 던져 길어 올린 마흔 가지 이별의 에피소드 중 하나다. ‘나쁜 남자’의 이별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젠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만나지 않게 된 오래된 연인 및 사물들과의 이야기이다.

 숱한 이별의 나날을 반복하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자신만의 잊혀지지 않는 헤어짐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며, 그것이 생의 어떤 의미인지 곱씹게 만든다. 글을 읽고 난 연후에는 그저 이별의 하늘엔 잔별도 많구나, 하며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는 무미한 일상을 자조하는 삶이 진정 행복한지 자문하게 된다.

 

 

 

 

 

 

 

  1. 루터는 1517년 〈95개 조항〉을 발표하고 면죄부와 중세 후기 유럽 교회의 신학과 성례전에 대해 논박했다. 1521년 루터는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당했다. 16세기와 17세기는 신학적 열정은 사라져버리고 무미건조한 정통주의에 길을 내주었다. 18세기 루터교는 합리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9세기에는 정통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루터교 교리는 보통 9개 신앙고백문으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초기 교회의 사도신경, 서방교회의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만이 모든 루터교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교리이다. 루터교는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북유럽과 서유럽에 많다. 루터교는 세계 본부를 인정하지 않으나 세계 대부분의 루터교도들은 제네바에 본부를 둔 루터교 세계연맹에 협력한다 [본문으로]
  2. 펌프스 또는 코트 슈즈 는 고리나 끈, 잠금 장치 등이 없고 발등 부분이 드러나게 깊이 파져 있는 여성용 구두이다. [본문으로]
  3. 에르메스(Hermès International)는 1837년 설립된 프랑스의 호화 상품 제조회사이다.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파리에서 창업했다. 원래 마구 용품과 안장을 판매하는 회사였으나,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가방이나 지갑과 같은 피혁 제품으로 사업을 전환하여 성공하였다. [본문으로]
  4. 켈리백은 여성 핸드백의 일종이다.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상단에 자물쇠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에르메스 제품이었지만 현재는 다양한 브랜드에서 이 형태의 가방이 판매되고 있다. [본문으로]
  5. 신비주의에서 육체가 없는 정령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가리키는 말.(poltergeist는 '소동' 또는 '소란'이라는 뜻의 독일어 Polter와 '정령'이라는 뜻의 독일어 Geist에서 유래). [본문으로]
  6. 금속이나 합성 수지로 만든 얇은 조각으로 둥근 모양, 꽃모양, 조개 모양으로 된 것 등 여러 가지이다. 그 색채와 광택은 빛을 반사하여 한결 반짝임이 더해지므로 야간에 착용하는 의상에 즐겨 사용한다. 핸드백이나 스웨터 등에 장식하는 경우도 많다. [본문으로]
  7.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1942.11.19~)은 랄프 로렌, 도나 카란과 더불어 20세기 말 아메리칸 스타일의 성장과 세계적 확산에 기여한 미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메리칸 디자이너 스포츠웨어를 시대 정신에 맞게 새롭게 선보였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재단과 뉴트럴 컬러에 기초한 모던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를 대중적으로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진과 향수, 언더웨어 비즈니스 등에서 진행된 과감한 홍보 전략이었다. 누드와 성적 표현의 금기에 도전한 캘빈 클라인 광고는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킨 동시에 캘빈 클라인의 상표에 차별화된 아우라를 만들어내며 거대한 패션 제국을 건설하는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캘빈 클라인의 의상들은 아메리칸 클래식 스타일, 미니멀리스트 패션으로 조명되고 있으며 평론가들은 그를 시대를 앞서 간 마케팅 천재로 평가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