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100편 감상

낚시의 즐거움 / 원응서

by 언덕에서 2011. 8. 4.

 

 

 

 

낚시의 즐거움

 

                                                                       원응서(1914 ~ 1973)

 

 

1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즐거웠던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본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즐거움에도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세분과 차이는 차치하고 개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내 경우엔 그 즐거웠던 나날은 낚시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만큼 내 생활의 즐거움은 낚시질하는 행위가 실어다 준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낚싯줄을 물에 드리우고 있지 않더라도 낚싯대가 낚시 연장을 매만질 때가 하루 중에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가난한 묵객은 시름이 있거나 무료할 땐 벼루에다 연적의 물을 부어 먹을 벅벅 갈아 거기에서 안겨 오는 향기로움으로 인생을 달랬다고 한다. 참으로 운치를 담은 경지라 하겠다. 낚싯대를 닦고 매만지는 심정도 이와 상통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낚싯대를 매만지는 것은 반드시 앞으로 고기 수확에 더 큰 기대를 거는 데서가 아니라 세상의 번거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묵연히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낚시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하루에 한동안이나마 생활의 실무에서 휴식을 주는 시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낚싯대를 매만지면서 무료를 끄며 일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이야말로 하루하루가 흐뭇해진다.

 즐거움은 반드시 큰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즐거움은 크면 클수록 오히려 지속이 안 되거나 반비례되는 일이 따를 가능성이 짙다.

 조그만 은은한 즐거움이야말로 영속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까닭인지 모른다.

 낚시에는 은근한 정미와 조그만 즐거움이 있는 대신 큰 즐거움이 따르지 않는 것은 곧 영속적인 의미가 내지하고 있어서이리라.

 언젠가 어느 낚시인의 글에서 읽은 한 대목이다.

 낚시 시즌이 지나고 한참 지루한 겨울 한밤중의 일이다. 가족들이 모두 고이 잠든 방 안에서 주인공은 낚싯대를 꺼내 홀연히 휘둘러 고기를 낚아본다. 그의 얼굴에서는 회심의 미소가 흐른다. 이 때 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낚시의 즐거움이고 낚시꾼의 즐거움의 표현일 것이다.

 

2

 낚시꾼에겐 물은 향수와도 같다. 물만 보아도 낚시꾼에겐 저절로 미소가 안겨 온다. 이것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그리는 마음에서이리라.

 논바닥에 고인 하잘것없는 물이건, 벌판 한구석에 웅크린 웅덩이건 물이면 그저 좋다. 하물며 호연한 물바다를 보았을 때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나오고 속이 후련해진다.

 이건 낚시꾼이면 누구나 느껴지는 감회이고 또 낚시꾼만이 누릴 수 있는 흥취일 것이다.

 그러나 기실 따지고 보면 물이 그립다는 그 자체는 물과 불가분의 사이인 물고기를 그리는 심정일 것이다.

 고기가 살지 않는 물은 나무 없는 산처럼 낚시꾼에겐 무의미하니까.

 해발 1천 미처 이상 높이의 고원에 가로놓인 장진호는 묘묘한 바다나 다름없다. 추운 지대이고 워낙 물이 깊어서인지 물고기가 놀지 않는다. 물빛이 짙다 못해 검다. 고기가 놀지 않는 물은 사수나 다름없이 매력이 없고 그 검은 물은 두렵기만 하다.

 바라보이는 물은 다 아름답고 시원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낚시꾼이라도 붉은 물이나 더러운 물보다는 물의 본연의 자세인 맑은 운치를 아쉬워하게 된다. 고름을 담그면 파란 물이 들 듯한 물이야말로 눈을 감으면 낚시꾼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마음의 소우주인 것이다.

 

3

 어느 낚시터고 고기가 잘 나오는 자리란 몇몇 군데로 정해져 있고 정해진 자리엔 으레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자리 주인이 나오지 않았을 땐 좋지만 낚는 도중에 그 주인이 나타나면 멋쩍다. 그러니 아예 그런 자리는 넘겨다보지 않고 숫제 새 자리를 찾는 수밖에 없다.

 말이 쉽지 새 자리를 찾는 일이란 도시 수월한 노릇이 아니라는 걸 낚시꾼이라면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모처럼 공휴일을 즐기려던 것이 대개는 새 자리 찾기로 황금의 하루를 낭비하기가 일쑤다.

 이런 사실을 마음에 다짐하고 난 후라야 이 어려운 작업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맡겨 두다시피 한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찾아서 낚는 데서 낚시의 참다운 즐거움과 참맛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마음의 자세는 어느 정도 돼 있지만 모처럼 그것이 돼 주지를 않는다. 하나 뜻대로 돼 주지가 않는 데에 실은 낚시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어느 자리에선 매일 정해 놓고 서너 치짜리가 3,40수씩 무슨 정리처럼 꼬박꼬박 나오기로 돼 있다면 실로 매력이 없는 낚시일 것이다. 낚싯대를 들어 보나마나 서너 치짜리 밖에 나오지 않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력이 없다기보다도 싱거울 것이다.

 사실 그 누구도 앉아 보지 않았던 새 자리에서 상상했던 대로 척척 낚아질 때처럼 자기만의 황홀을 느끼는 일은 또 없을 것이다. 낚시가 다른 오락이나 스포츠보다도 영속적인 매력을 주는 것도 그것이 무궁무진한 근원을 지니고 있어서이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좋은 자리란 우연히 얻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좋은 판단과 시간을 투자한 개척적인 노력에서만 이루어지는 총화일 것이다.

 

4

 낚시에 들린 상태를 가리켜 무슨 일이든 낚시를 하듯 하면 안 될 일이 없을 거라고 한다. 무엇에 들린다거나 심취한다는 그 자체는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낚시꾼치고 다소 차이가 있을망정 홀리거나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홀리고 들리거나 또 홀리게 하고 들리게 하는 데가 또 하나의 낚시의 무진한 묘미이고 매력인 것이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의 대낚시나 한겨울의 삼봉낚시라도 낚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꾼'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보아 왔다.

 새벽에 낚싯대를 둘러메고 떠나가는 마당이야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가슴이 부풀대로 부푼 순간이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먹었던 장소에라도 뜻대로 가 앉게 되어 여건들이 착착 들어맞는 날이면 기분은 더할 나위 없다. 게다가 기대한 대로 낚아질 때는 옆에 벼락이 굴러 떨어져도 모를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여느 때 끼니가 좀 늦어질라치면 아우성이고 으르렁대던 사람도 이쯤 되면 적어도 한두 끼니는 무난히 걸러 넘긴다.

이런 걸 두고 몰입 혹은 무아삼매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 사람일수록 서민적인 오락의 빈곤이 따르고 심지어는 낚시는 한가한 층이 즐기는 것이고 노인네나 소일풀이로 하는 소외된 놀음으로 여기는 편견이 아직도 더러는 잔존하고 있다.

 이것은 실은 꽤 실질적인 면을 추궁하면서도 되레 실질적이 못 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로만 여겨진다. 많은 투자가 필요한 승마나 골프는 하나의 떳떳한 스포츠로 보면서도 헐값으로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낚시를 꼬집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현대 생활이 긴장을 낳고 복잡해지는 사회일수록 거기서 오는 피로와 병폐를 푸는 작업, 레크리에이션이란 행위가 절실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영국사람 같은, 우리들보다도 더 실질적인 국민도 낚시를 더 많이 즐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필드 앤드 스트림>을 보면 영국에서는 해마다 전국 낚시 대회가 국가적인 규모로 열리는데 이 날의 대낚시 대회에는 전국에서 등록된 직업 선수 1천 3백 명 내외가 출전을 하고 더비 데이 못지않게 벌판에 갑작스런 텐트 도시가 생기고 각종 낚시 연장의 바겐세일 , 전국 낚시 상점들의 특제품 전시회, 정부 지정 복권 매매소, 음식점, 술집 등 수십만의 인파와 차량으로 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영국에는 낚시를 직업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 정도는 영국의 보통 공무원 정도이고 그 수효는 1천 명 이상이라고 했다. 이 선수들은 주로 거의 주일마다 있는 지방 대회에 출전함으로써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들 낚시는 강낚시이고 미끼는 구더기, 그것도 노랑, 빨강, 하양, 그리고 돼지(꼬리 난 구더기) 등 다섯 가지를 보통 쓰고 있다. 낚싯대는 플라스틱 제품이 많으나 소위 일류 선수들은 일본에서 수입해 온 참대 대낚을 쓰고 있다.

 여하튼 1년에 한 번씩 가을에 열리는 이 전국 낚시 대회는 대회 일을 며칠 앞두고서부터 즐거운 축제일처럼 낚시 동호인들은 들뜬다. 막상 대회일이 닥치면 각 지방에서 선출되어 출전한 선수들은 선수대로 몇 만 달러의 상금으로 가슴이 부풀고 또 낚시 상인들은 1년 중의 최고의 매상을 올리니 그렇고 또 낚시 애호가나 관광객들은 복권으로 해서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이란 나라는 이래서 우리들보다 즐거운 고장이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5

 중국의 문필가 김성탄의 글을 읽으면 여름날의 무더위를 두고 묘사한 재미스런 장면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래서 여름 낚시를 하면서 가끔 생각나는 것이 그의 글이다.

 '여름날 삼복 거리에 돗자리는 축축하고 파리 떼가 얼굴 근처를 날아다니나 아무리 쫓아도 달아나질 않는다. 이 때 별안간 천둥이 우르르 진동을 치더니 이윽고 처마 끝에서 폭포처럼 빗물이 쏟아져 내린다.

 이래서 성화스럽던 파리 떼는 자취를 감추어 이 때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닐소냐.'

 김성탄은 꽤는 가난해서 줄곧 방 안에서 여름 무더위와 싸우는 그런 생활이었으리라.

 낚시는 봄. 여름. 가을, 그 어느 계절이고 그것대로 독자적인 맛이 있다.

봄은 본대로 곡우를 전후해서 산란기를 맞아 신록과 더불어 겨우 내 집 안에 갇혔던 울적을 향기로 씻을 수 있으니 즐겁고, 하지를 지난 무더운 여름은 여름대로 깊은 수심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강바람과 들바람을 쐬니 또 즐겁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은 푸른 하늘과 황금물결 치는 오곡의 벌판과 울긋불긋 곱게 물든 산야에서 샛바람을 맞는 마음도 또한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낚시 계절 중에서도 여름은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땀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뙤약볕 밑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느냐고 대뜸 반문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낚시를 드리우고 우선 윗도리와 바지를 훨훨 벗어 던진다. 이렇게 해서 팬티 바람이 되어 맨발을 물에 담가 보라. 그리고서는 양산을 딱 버텨 놓으면 그만이다. 모자도 삿갓도 소용없다. 몸에는 다만 팬티가 한 장 걸쳐있을 뿐 어느덧 양산 밑으로는 신선이 오락가락한다. 수면을 타고 불어오는 미풍은 오히려 간지럽기까지 하다. 이쯤 되면 세상엔 부러운 것이 없을 지경이다.

 탑탑한 방 안에서 인공적으로 내는 선풍기의 바람을 나는 병적으로 싫어한다. 에어컨디셔너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피서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서민들에게는 양산 밑으로는 신선이 노니는 여름 낚시는 안성맞춤이다.

 하루쯤 이렇게 낚시를 즐기고 나면 며칠을 더위를 모르고 지나게 된다. 별로 땀도 나지 않는다. 왠지 모르지만 몸까지 가벼워진다. 이것은 또한 겨우내 감기를 막아 주는 약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내 경험으로도 여름 낚시만 잘하면 감기는 모르고 지냈으니까.

 그러나 여름 낚시는 감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런 이점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지나지 않고 낚시의 본뜻은 생활에 즐거움을 실어다 주는 데 있을 것이다.

 김성탄도 일찍이 이 신선 놀이의 맛을 알았더라면 이런 시시한 글이 아니라 멋진 통쾌한 글이 , 혹은 <낚시의 즐거움>이란 제명으로 더욱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원응서(1914 ~ 1973) . 번역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를 졸업했고 1.4후퇴 때 월남했다. 문예지 <문학>의 주간을 역임하였고,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이다. 번역작품으로는 <나의 사랑 안드리스>, <길은 멀어도>, <마음의 대화>, <제인 에어>, <25시> 등이 있다.

'수필 100편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색(暮色) / 이영도  (0) 2011.08.16
나무 / 김광섭  (0) 2011.08.09
삶의 슬기 / 전숙희  (0) 2011.07.28
나의 소원 / 김구  (0) 2011.07.19
30년 전의 그날 / 강원룡  (0) 2011.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