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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봉숭아 꽃 / 김지하

by 언덕에서 2011. 2. 1.

 

 

봉숭아꽃

 

                                                                 김지하(1941 ~ )

 

 

 

 

 

내 방 문 앞 화단에 봉숭아꽃이 활짝 폈다.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봉숭아꽃이 자취를 감춘 게 그 언제던가? 그 언젠지도 모르게 봉숭아꽃,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등이 우리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 살결에 흰 무명옷, 검은 머리채에 흰 이를 드러내고 웃던 누님의 모습처럼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없다. 봉숭아꽃으로 물들인 누님의 그 분홍빛 손톱에서 떠오르던 그 소담한 아름다움도 자취 없다.

 지금 와 생각해본다.

 그 누님은 오직 제 몸에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였을까? 옛 어른들은 말하길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이면 신경통이 가라앉고 저승길이 밝아진다고 했다. 그것은 또 무슨 뜻이었을까? 봉숭아 꽃잎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신경통에 효험이 있는 약성분이 들어 있는 것은 틀림없겠으나 저승길이 밝아진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

 저승길이 밝아진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고 죽을 때 수월하게 숨을 거둔다는 말도 된다. 다만 미신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엄청난 말이 된다. 곧 봉숭아꽃이 사람 목숨을 제대로 살게 하는 큰 영약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호흡이 고리어지고 몸의 음양이 잘 아우러질 뿐 아니라 신진대사가 잘 되고 정신이 맑고 밝게 된다는 뜻이 되겠다. 이것 큰 보약 아닌가.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기에, 무슨 성분이 있기에, 또 무슨 작용을 하기에 그런 것일까? 봉숭아꽃의 음양과 사람 몸, 특히 신경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을 잘은 알 수 없다고 해도 하나만은 알겠다. 누님들은 몸을 예쁘게 가꾸기 위해서만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몸에 양생(養生)의 효험이 있는 것이 곧 아름다움이었다는 것을. 봉숭아꽃을 집 안에 심는 것도 모양만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약재(藥材)로 심어놓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니 약재는 아름답다는 것을.

 그렇다면 필시 채송화도 분꽃도 맨드라미도 다 무슨 양생이나 치료와 관계가 있는 약재일 것이 분명하다. 하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초가집 마당에는 뒤뜰이나 앞뜰 울타리가로 빙 둘러 반드시 유실수를 심었다. 왜놈들처럼 공연히 향나무니 사철나무 따위를 그것도 몽땅 요상스럽게 가위질하고 괴상스럽게 구부려서 억지 춘향을 만들어놓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몰론 일본엔 습기와 독충 등의 피해 때문에 향나무를 심은 것이겠지만 우리네 마을집 장독가나 마당가에처럼 자연스럽게 심어진 것은 아니다. 그 흔한 살구나무가 꽃도 물론 예쁘지만 어디 모양으로만 심어졌겠는가? 어린아이가 배가 아플 때 살구 씨를 달여 먹였고, 살구는 표백작용도 한다. 우리네 집들은 모두 약장이었고, 과일장이었고, 우리의 밥상은 바로 약상이요, 제삿상이이요, 잔치상이었다.

 

 우리 민중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삶의 아름다움이다. 삶 따로 있고 아름다움 따로 있지 않았다. 삶다움이 바로 아름다움이었다. 우리 민중에게 있어서 삶이란 음양을 통일하는 일기(一氣)의 삶이었다. 그 삶이 기(氣)와 음양의 순리로부터 옮겨지고, 그 기와 음양의 흐름이 막히거나 잘리면 몸에 병이 나고 마음이 이미 죽임당해 저승길이 어두워졌다. 그 옮김을 옮기지 못할 본래의 통일적 삶으로 회복하고 막힌 기를 뚫어주고 뒤집힌 음양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역시 기와 음양의 세계관이었고, 기와 음양의 처방이었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또다시 기와 음양을 옮기거나 막거나 자르는 일을 극력 경계했다.

 우리 민중의 본디 삶은 흙이나 식물과 또는 동물과의 깊은 인연 속에 있는 것이고 인류 전체도 그렇다. 따라서 치료는 반드시 자연건강법을 먼저로 했고, 다음엔 약재로서 식물 그리고 아주 흔치 않게 동물성을 취했으나 광물질만은 극도로 경계했다. 오늘날 온갖 약품은 광물질에서 뽑아내고 그것을 무슨 큰 진보요 개발이나 되는 듯이 좋아하고 쓰는 짓이 과연 옳은 짓일까? 그것들은 또 다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그것을 만들어내고 팔고 쓰게 하는 모든 양식들은 우리의 삶을 옮겨 분열과 소외와 죽임으로 몰아넣는다.

 봉숭아꽃은 좋은 약재였다.

 하기 때문에 누님들만이 아니라 어머니, 할머니들까지 손톱에 물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봉숭아꽃은 어여쁘고, 그래서 물들인 손톱은 그리도 아리따웠던 것이다. 봉숭아꽃은 어여쁘고, 그래서 물들인 손톱은 그리도 아리따웠던 것이다. 봉숭아꽃도, 그 누님들, 그 어머니들의 모습도, 이제는 살구꽃 피던 그 옛날 마을집도 다 잃어버렸지만 그 속에 살아 우리의 삶을 통일시켜주던 삶의 원리, 기와 음양의 이치를 우리 마음에서부터 살려내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되살려 실천함으로써 분열된 우리의 삶을 다시 통일할 수 없을까. 그 때 비로소 우리의 건강한 몸에 다함께 아름다운 봉숭아꽃이 만발할 것이다.

 보편적 생존의 통일이 만들어지는 현실의 올바른 존재방식이 바로 아름다운 현실인 것이다.

 

 

 


 

 

 

 

시인. 본명은 영일(英一).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69년 시 저녁 이야기〉 〈황톳길등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70년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시 오적(五賊)을 발표,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75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80년 형집행 정지로 출감하였다. 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AALA)에서 주는 로터스 특별상을 받았다.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비어(蜚語》 《()》 《이 가문날의 비구름》 《애린 1, 2》 《별밭을 우러르며등이 있고, 산문집 》 《살림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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