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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바보네 가게 / 박연구

by 언덕에서 2011. 1. 11.

 

 

 

바보네 가게

 

 

                                                                  박연구(1934 ~ 2003)

 

 

 

 

 

우리 집 근처에는 식료품 가게가 세 군데 있다. 그런데 유독 '바보네 가게'로만 손님이 몰렸다.

 '바보네 가게' - 어쩐지 이름이 좋았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쌀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깍쟁이 같은 인상이 없기 때문에, 똑 같은 물건을 같은 값을 주고 샀을지라도 싸게 산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어째서 '바보네 가게'라고 부르는가고 물어 보았다. 지금 가게 주인보다 먼저 있었던 주인의 집에 바보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불러 오고 있는데, 지금 주인 역시 그 이름을 싫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집에서는 콩나물 같은 건 하나도 이를 보지 않고 딴 가게보다 훨씬 싸게 주어 버려 다른 물건도 으레 싸게 팔겠거니 싶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거다.

 어느 작가의 단편 <상지대(商地帶)>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똑같은 규모의 두 가게가 마주 대하고 있는데, 계산에 밝은 인상의 똑똑한 주인의 가게는 파리만 날리고 바보스럽게 보이는 주인의 가게는 손님이 많아 장사가 잘 되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보 주인의 상술인즉 이러했다. 일부러 말도 바보스럽게 하면서 행동을 하면 손님들이 멍텅구리라 물건을 싸게 주겠거니 하고 모여든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똑똑하다는 걸 인식할 때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는 심리를 역으로 이용한 거다.

 바보와 비슷한 이름이 여러 개 있다. '멍텅구리 상점', '돼지 저금통' '곰선생' --이 얼마나 구수하고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름들이냐.

 '멍텅구리 상점'은 '바보네 가게'와 비슷하니 설명을 생략하고 '돼지 저금통', '곰선생'을 이야기해 보자.

 우리 집에 돼지 저금통이 몇 개 있다. 돼지 꿈을 꾸면 재수가 좋다는 말도 있듯이 집에서 남자 아이들은 흔히 애칭으로 '돼지'라고 부르는 걸 볼 수 있다. 돼지는 아무 거나 잘 먹는 소탈한 성품이어서 자손이 귀한 집 아들 이름을 돼지라고 하는 수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신발 닦은 값이라도 주면 눈꼬리가 길게 웃고 있는 돼지 조금통 안에 넣어 주지 않을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내 아내도 50원짜리 은전을 꼭꼭 자기 돼지 저금통에 넣어 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50원짜리 은전이 생기면 퇴근 후에 웃옷을 받아 드는 아내의 손바닥에 한 닢 혹은 두 닢을 놓아 주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가 되었다.

 돼지를 미련한 짐승으로 보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우악스럽게 기운이 센 멧돼지가 힘을 내면 호랑이도 잡는다. 아무리 영악스런 호랑이지만 멧돼지가 어느 순간을 보아 큰 나무나 바위에 대고 힘대로 밀어버리면 호랑이는 영락없이 죽고 만다.

 바보스런 웃음으로 우리 아이들과 내 아내의 동전과 은전을 주는 대로 삼킨 돼지 저금통이 어느 땐가 위력을 부리면 급병이 난 식구를 구해 줄 수도 있다고 믿어질 때 더없이 애착이 간다.

 누구나 학교 다닐 때 '곰 선생'이란 별명을 지닌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직스러운 듯 하지만 한없이 좋은 선생님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선생님이 화나면 그 어느 선생님보다도 무섭다.

 곰은 절대로 미련한 짐승이 아니다. 둔한 동작으로 시냇물 속을 거닐다가 물고기가 나타나면 앞발을 번개같이 놀려 잡아낸다. 파리채로 파리를 잡듯이 그 넓적한 발바닥으로 물탕을 치는 동작이야말로 '곰'이 아니라 하겠다.

 친구를 사귈 때에도 너무 똑똑한 사람은 어쩐지 접근하기가 망설여진다. 상대방에게도 만만한 데가 보여야 이쪽의 약점과 상쇄가 가능해서 허물없이 교분을 틀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저쪽이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면 항상 이쪽이 못난 놈으로만 비칠 것 같아 싫을밖에.

 세상의 아내들도 조금 바보스럽거나 일부러라도 바보스럽기를 바라고 싶다. 이 말에 당장 화를 내실 분이 있을 듯 하다. 어떤 못난 남자가 제 아내가 바보스럽기를 바랄 것이냐고, 옳은 말씀이다. 내가 말하려는 바보는 그런 통념의 바보가 아니다.

 특히 남자들은 직장에서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바보 취급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경쟁 의식은 노이로제 증상을 일으키고 열등감으로 피로가 겹친다. 이 샐러리맨이 가정에 돌아가면 또 아내라는 사람에게 신경을 써야 한다. 연탄값, 쌀값, 학비, 의복비 등 수없는 청구서를 내밀면서 지난달에도 얼마가 적자인데 언제까지고 이 모양 이꼴로 살아야 하느냐고 따지면 무능한 가장은 더욱 피로가 겹친다. 쉴 곳이 없다. 이런 경제 능력 말고도 똑똑한 아내에게 이론에 있어서 달리면 열등 콤플렉스가 되어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 쉽다.

 내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우리 아내들이 짐짓 바보인 척 하는 것 같다. 유행에 둔감한 척 의상비를 자주 청구하지 않는 거는 남편의 수입을 고려함이요,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는지 대포 몇 잔에 호기를 부리고 대문을 두드리면 영웅 대접하듯 맞아들이는 매너야말로 활력의 충전(充電)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어쩌면 내 집이 바로 '바보네 가게'가 아닌가 한다. 돈은 물론이고 무엇이든 부족하게 주는 나에게 반대 급부가 너무 융숭했기 때문이다. 여섯 살짜리 막내딸 아이는 10원만 주어도 아빠에게 뽀뽀를 해 주고 그리고 또…….

 

 

 


 

박연구. 수필가. 전남 담양군 수평면 두정리 출생. 호 매원(梅園). 1954년 광주고교 졸업. 1963년 월간 [신세계]에 수필 <수집 취미>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1970현대수필동인회주간, 1972[수필문학사] 주간, 1973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현대수필문학상(1987), 한국수필문학상(1990), 한국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