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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겨울 나무 / 황동규

by 언덕에서 2011. 3. 24.

 

겨울 나무

 

                                                                       황동규 (1938 ~ )

 

 

 

 

 

 

 

잎사귀가 크고 화려한 나무들이 겨울 몇 달 동안 옷을 벗고 서 있는 모습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즈음 서울 시내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 되었지만, 어쩌다 덕수궁이나 비원에 들를 때 알맞게 마른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편안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생략할 것을 다 생략한 어떤 엄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 엄격함에 끌려 박수근 같은 화가는 여름 나무도 겨울나무처럼 그렸을 것이다.

 활엽수 가운데서도 느티와 버들의 누드는 마음을 끈다. 빗자루처럼 멋없이 박혀 있는 겨울 포플러나 집념투성이의 가지를 사방으로 내밀고 있는 벚나무의 나체는 우리가 쉽게 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주지 않는다. 가로수이기 때문이겠지만 여기저기 골절상을 입은 플라타너스의 맨몸도 마찬가지다.

 느티는 의젓하고 깊다. 따로따로 서 있되 조바심이 느껴지지 않는, 편안히 서 있는 겨울느티들을 보노라면 나무의 어떤 원형 같은 것이 느껴진다. 우리의 상상이나 꿈속에 숨쉬는 나무들, 그들 위에 겨울 느티들이 서있는 것이다. 큰 가지들을 자연스레 펼치고 잔가지들은 섬세하게 위로 올리고 서있다. 형태도 형태지만 그 색감이란! 그것도 띄엄띄엄 눈을 쓰고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을 때 색의 질감이란!

 버들의 벗은 몸은 모던하다. 다른 나무들이 모두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는데 버들은 대지를 행해 가는 가지들을 늘어뜨린다. 잘 빗은 긴 머리카락으로 둥글게 몸을 가린 여자의 몸이다. 덕수궁에 있는 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로수로 서 있는 버들도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버들이 가로수로 택해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을씨년스러운 서울의 겨울 거리를 얼마나 부드럽게 해주는가.

 그러나 같은 겨울나무들도 서 있는 것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 봄여름에는 별 차이가 없으나 겨울 덕수궁에서 보는 나무와 비원에서 보는 나무는 다른 것이다. 비원의 나무가 넉넉하고 편안히 서 있는 데 반해 덕수궁의 나무는 어쩐지 뒤틀리고 불안하게 서 있다. 주위의 소음 때문이 아니면 공기오염 때문일 것이다. 명동 구석에 박혀 있는 나무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잎을 두르고 있을 때는 비슷하던 것이 이처럼 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기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별로 구별이 되지 않지만 일단 일을 그치고 겨울나무처럼 쉴 때 차이는 드러난다. 정신이 서 있는 곳에 따라 모습이 정해지는 것이다. 내가 쉴 때, 내 분위기는 어디 있는 나무인가? 혹시 비원의 나무인가, 덕수궁의 나무인가? 혹시 명동이나 충무로 구석에 궁상맞게 서 있는 나무는 아닌가?

 

 


 

황동규. 시인. 대학교수.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이다. 세련된 감수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견고한 서정의 세계를 노래해 문학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 사랑 받는 중견시인. 주요 작품으로 《즐거운 편지》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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