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의 얘기
노천명 (1912 ~ 1957)
"좋아하는 눈 왔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할멈이 내 창 앞에 와서 이렇게 지껄이는 소리에 얼른 덧문을 열고 내다보니 눈보라가 날리고 있어 내가 또 싱겁게 좋아했더니 저녁부터 날씨는 갑자기 쌀쌀해지고 말았다.
방이 외풍이 세서 어제 오늘로 부쩍 병풍이 생각나고 방장 만들 궁리를 한다. 시골집의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병풍을 가져올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그 병풍을 치고 내가 홍역을 할 때 밤을 꼬빡 새시며 얼굴에 손이 못 올라가게 지키셨다고 들었다. 지금 그것을 내 방에다 가져다 치고 보면 내 생각은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타산 뾰죽한 멧부리들이 둥글게 묻히도록 눈이 와 쌓일라치면 아버지는 친구들과 곧잘 노루 사냥을 떠나셨다. 그래가지고는 그제나 시방이나 몸이 약한 내게 노루피를 먹이려고 하시는 통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랑에 나가 돈을 달라던 내가 온종일 아버지한텔 나가지 못하고 숨어서 상노애더러 아버지한테 가서 돈을 달래 오라고 울고 매달린 적도 있었고 어려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따랐다. 술을 못 하시는 아버지가 늘 사랑에 가 조용히 앉아서 골패를 떼시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골패를 섞는 소리는 왜 그렇게 듣기 좋았는지.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고 나이를 차츰 먹고 보니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늦도록 부모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행복된 일이다. 헌데 세상 사람이 흔히 부모를 여의고 나서야 어버이가 귀한 줄을 통절히 느낀다는 것은 이 무슨 안타까운 일이랴.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동화 같은 옛일들이 머릿속에 피어오른다. 겨울밤은 길고 내 마음은 구성진데, 비를 머금은 날이 밤새도록 기차 바퀴 소리를 들려 주면 실로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츠아라리엔더가 <남녘의 유혹>에서 느낀 것 같은 향수에 내가 한없이 빠져들어간다. 이런 시간이란 어찌 보면 청승스럽게도 보이나. 실은 그 위에 가는 사치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진실로 잔인하게 나는 이것을 즐긴다. 어떠한 다른 환경을 가져 본다 치더라도, 내 가슴에 지니는 향낭은 없이도 견딜 수 있으나. 일종의 이 '페이소스'가 없이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실상 인생 생활에 이 비애가 없다면 도대체 심심해서 어떻게 배겨 내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다 고독을 지니고 다니는 하이칼라는 없는가?
이런 친구를 만난다면 내가 아끼는 신비로운 이 긴 밤들을 그 친구와 함께 화롯가에서 얘기를 뿌리며 밝혀도 좋겠다. 늙은 시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밤이 한없이 아깝다.
노천명. 시인. 초기에는 감상적인 서정시를 썼으나 뒤에는 사랑과 종교적 참회를 그린 시를 썼다. 시집에 《사슴의노래》, 《노천명시집》, 《산호림(珊瑚林)》따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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