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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나의 단장(短杖)

by 언덕에서 2011. 5. 10.

 

 

 

나의 단장(短杖)

 

                                                                     김동석(金東錫, 1913~?)

 

 

나서 고생하다가 죽는 것이 누구나 피치 못할 운명일지라도 언제나 젊고 싶고 늙고 싶지 않은 것이 인정이요, 만인의 공통된 염원일 것이다. 여북해야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그러나 노인 앞에선 안경도 못 쓰고, 담배도 못 피우고 술도 못 마시고, 편히 앉지도 못하는 것이 청춘이라면 청춘의 보람이 무엇이며, 마음껏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이 무슨 청춘일까.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얼른 어른이 되고 일찌감치 늙으려고 의식적으로 꾀하였던 것이다. 다리를 쭉 뻗고 기를 펴고 지내보려면 모름지기 존장(尊長)이 돼야 할지니 젊은이들은 웅크리고 숨죽이고 눌려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뻗고 펴고 자라는 생명이 점점 구부러지고 움츠려지고 시들어졌다.

 그래서 내가 나이 서른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젊은 놈이 지팡이가 다 무슨 지팡이람."

하고 괘씸하다는 눈치로 보는 노인들이나,

 "여보게 자네 나이에 스테키가 다 무언가."

하고 항의하는 젊은 축들은 모두 평양 사람들이 이르는 '개화장(開化杖)'인 나의 단장(短杖)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의 단장은 구부러지고 엎드러지려는 인생을 떠받치는 버팀 막대기가 아니라 실로 약동하는 생명의 율동에 맞춰서 대지를 치고는 몸을 위로 솟구는 청춘의 목마다. 단장을 짚고 다니는 맛은ㅡ 군도 한번 시험해 보라ㅡ 땅 위를 걸어가지 않고 뛰며 간다는 감각이다.

 또 단장은 짐승으로 치면 꼬리라 할까. 소나 말꼬리가 오뉴월 파리를 쫓듯 개나 고양이 꼬리가 급커브를 돌 때 배의 키 노릇을 하듯 스테키도 실용적 가치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것은 없는 셈 치더라도 강아지 꼬리같이 감정의 명암을 선명히 노출하는 것이 스테키다. 나는 단장을 통하여 500년 동안 눌려 있던 청춘의 느낌을 표현한다. 나의 스데키 끝이 허공에 그리는 포물선이며 타원이며 쌍곡선이며 반원은 중세기의 암흑을 뚫고 무지갯빛 찬란히 꽃핀 르네상스의 예술이나 같은 것이다. 적어도 기쁨이 있을 때 흔드는 강아지의 꼬리나 같은 것이다.

 희로애락을 형용에 나타내서는 못쓴다는 조선 재래의 관념으로 본다 치면 나의 단장은 과연 당돌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흉중에 일어나는 파동을 손끝에 전해도 뭣할 텐데 손끝의 파문을 단장으로써 확대하여 여보란 듯이 내두르다니!

그러나 새는 노래하고 나비는 춤추고 강아지는 꼬리 치는 것이 청춘의 청춘다운 표정이 아닌가. 그와 꼭 마찬가질 나의 단장은 춤추며 노래하며 꼬리 치는 것이다.

 일전에는 고향에 들러 오는 길에 '땡볕에 채송화가 영악스런' 조그만 정거장 플랫폼에서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느라고 반 시간이나 서성거린 일이 있는데 단장이 없었더라면 지루해서 어쩔 줄 모를 뻔했다. 다행히 손에는 스데키를 들었고 플랫폼 위에는 옥수수의 속이 널브러지게 굴러 있었으므로 나는 생전 처음 단장과 옥수수 속으로 촌 정거장 플랫폼에서 골프를 했다. 그러곤 뒷짐 지고 단장에 기대서서 날아가는 새와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이태백 같은 시인도 항간에서는 자연을 즐길 수가 없었던지 경정산에 앉아서야 비로소 높이 날아가는 새들이며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새도 높이 날아 아득히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도 홀로 한가로이 떠도는데

보고 다시 보아도 물리지 않는 것은

다만 경정산뿐이라네.

 

라는 시경(詩境)을 얻었거늘 단장이 없었던들 내 어찌 권태가 자욱한 촌 정거장에서 인생을 즐길 수 있었으랴.

 그런데 나의 스테키는 B군이 술김에 나에게 물려준 것으로서 학생 때 2원 70전인가 주고 산 것이라 한다. 등나무를 구부린 것으로서 끝을 철로 입혔을 뿐 아무 꾸밈이 없는 소박한 단장이다. 하지만 나의 평범한 인생 행로의 반려로선 이것으로 족하다.

 내가 알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호사스런 단장은 애급왕 투탕카멘의 소지품이었던 것으로서 쥐는 데는 내 스테키 모양으로 구부러진 것인데 나무를 그냥 구부린 것이 아니라 상아와 금으로 정교무비(精巧無比)하게 셈 어족의 포로를 조각한 것과 흑단과 금으로 흑인종의 포로를 조각한 것이다. 따라서 전자는 얼굴이 희고 후자는 검을 뿐 아니라 두 종족의 특징을 여간 잘 구별해 표현한 것이 아니다. 투탕카멘은 열 살쯤에 즉위하여 그 후 9년쯤밖에 재세하지 않았으니, 이런 단장들도 노후를 지탱하는 '지팡이'가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다. '오늘 하루를 즉 행복히 살자'는 것이 그들이 좋아하는 금언의 하나이었던 만큼 삼천수백 년 전에 벌써 애급인은 단장이 인생을 걸어가는 데 가장 좋은 반려인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니 사후에도 육체가 걸어 다니는 것을 믿었던 그들은 왕의 시체를 썩지 않게 미라를 만들고 그 옆에 음식물과 함께 단장을 놓아두었던 것이다.

 그것을 왕릉에서 발굴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카이로 박물관에서 보는 투탕카멘의 단장이다.

 왜 나는 이렇게 길게 나의 단장을 변명해야 되느냐? 인간의 행동 중에 가장 부자연스런 입으로 연기를 머금고 코로 다시 내보내는 짓을 하되 태연한 사람들이 왜, 쥐려고 마련된 손에 막대기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을 시비하느냐 말이다. 단장이 낳은 이 자의식은 움츠리고 뒤꽁무니 빼고 살던 위축된 생활의 잔재임에 틀림없다.

 같은 값이면 멋있고 으쓱하고 씩씩하게 살아보자. 값진 양복을 입지 않아도 자가용을 타지 않아도 단장을 휘두르고 다니기만 하면ㅡ 때로 휘파람도 불어야 하지만 ㅡ 청춘은 즐거울 것이다.

 군도 한번 단장을 휘두르며 종로 네거리를 활보해 보지 않으려는가.

 


☞김동석(1913~ ?) : 시인ㆍ비평가.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 출생. 인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뒤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와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를 거쳐서 광복될 때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44년에는 연극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비평가로 활동하였으며, 주간 [상아탑(象牙塔)]을 간행하였다. 1946년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고 1950년에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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