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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아버지의 추억 / 은희경

by 언덕에서 2011. 4. 14.

 

 

 

아버지의 추억

 

                                                                     은희경(1959 ~ )

 

 

 

 

 

나의 아버지는 한시라도 재미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분이다. 피란지에서 보낸 대학시절에는 늦둥이 막내아들답게 부모를 속여 타낸 돈으로 친구들과 바닷가를 쏘다녔고, ‘증산 수출 건설’의 시대에는 뇌물과 접대로 굴러가는 노가다 판의 젊은 건설업자로서 재미있을 만한 일은 모두 다 해봤다. 심지어는 일흔 되던 해 암이 재발해서 의사들이 손도 못 대보고 환부를 덮어버린 지 한 달 만에 골프장에 나갔던 분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배짱과 낙천성뿐이었던 아버지는 그리 행운이 따르지 않는 자신의 인생을 지략과 언변으로 돌파해 나가려고 했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아버지의 밑천이 있다면 그것은 농담이다. 아버지는 늘 농담을 해서 주변 사람을 웃게도, 또 기가 차게도 만들었다. 부도가 나서 현장 십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40대에 아버지는 객지의 공사판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대신 ‘쿨’하게도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라디오 심야프로에 심취했다. 애꿎은 투서 때문에 부실공사 혐의를 쓰고 구치소에 갔을 때가 아버지 인생의 최대 위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아버지는 방장으로 뽑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아버지는 백일 지난 딸을 품에 안은 채 담배를 피우다가 강보 위로 재가 툭 떨어지는 바람에 너무나도 놀랐으며, 얼마나 속상했던지 몇 끼를 굶었다고 한다. 그 딸이 여고시절 교복을 다림질하다 팔을 덴 것을 보고 아버지는 몹시 화를 냈다.

 “너 나중에 좋아하는 남자가 그 흉터 싫어하면 어떡할래?”

 귀중품을 손상당한 듯한 아버지의 말투에 딸의 대꾸는 자신만만했다.

 “그딴 거 따지는 남자는 상대도 안 할 건데 뭐.”

 딸을 한 점의 티도 흉터도 없이 키우려는 아버지 덕분에 그 딸은 조금 거만하게 자란 듯하다. 그럴 만도 했다. 즐겨 듣던 ‘트윈 폴리오’의 레코드를 부주의한 딸이 밟아버렸을 때, 또 사춘기의 육중한 엉덩이를 세면대에 붙이고 양치질을 하다가 그것을 무너뜨려버렸을 때 아버지는, 뛰어난 발이다, 대단한 엉덩이다, 하며 웃었을 따름이다. 집을 설계할 때에도 아버지는 아침마다 환한 햇살 속에서 깨어나도록 딸의 방을 해 뜨는 쪽으로 배치했다. 그 방의 창을 열면 마치 청혼자의 무리처럼 장미가 몇 줄로 길게 늘어선 뜰이 있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낭만적인 연애감정을 유전자로 물려주었을 뿐 아니라 성장과정 속에서 학습까지 시켰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나를 귀하게 대접해야 남도 나를 귀하게 여긴다. 귀한 존재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거야. 그 말은 평생 딸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준 자존심의 보루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버거운 속박이었음을 아버지는 아시는지.

 고3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버지와 나는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 인파를 헤치며 캐럴이 울려 퍼지는 명동거리를 누볐다. 내게 처음 술을 사준 것도 아버지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기타를 치며 부르던 감상적인 ‘새드 무비’의 음률처럼, 아버지가 피우던 파이프 담배의 체리 향처럼, 연인으로서의 아버지는 이내 세월의 뒤로 사라졌다. 나의 결혼은 약간 소란스러웠다. 억지로 얻어낸 승낙이었고, 마치 옛 애인에게 등을 돌리듯이 서먹하게 아버지로부터 떠나버렸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 주었던 환상 뒤편에 기다리고 있던 환멸을 톡톡히 겪어내야만 했다. 내 인생에 더 이상 맹목적인 연인은 없었다. 남루한 존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결국 아버지는 내게 환상도 주었지만 환멸도 가르친 셈이다. 그러나 환멸도 사랑이다. 그것은 아버지 가신 후에 알았다.

 

 

 


 

 

 

 

은희경(1959 ~). 소설가. 전북 고창 출생. 숙명여대 졸업. 풍부한 상상력과 능숙한 구성력, 인간을 꿰뚫어보는 신선하고 유머러스한 시선, 감각적 문체 구사에 뛰어난 소설가. 등단하자마자 문학적 인정을 받았으며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마이너리그><그것은 꿈이었을까><새의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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