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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학살의 일부 4 / 김소연

by 언덕에서 2025. 3. 20.

 

 

학살의 일부 4

 

                                                                                                      김소연(1967~)

 

 

아버지의 삶을 쓰기 위해 소설에 매달린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아버지 알코올에 중독된 자신을 이기지 못하시고 박카스 한 병짜리 농약을 마시곤 대낮 약수터에서 이승을 떠나셨다. 세상의 곤궁함과 그 곤궁함에 귀속되지 못하여 쩔쩔매던 중학교 때 수학 선생은 여관방에서 목을 맸고, 즐기던 그 술에 기분 좋게 취하여 귀가하던 나의 큰아버지께서는 세차장 홈에 빠져 어이없는 실족사로 삶의 문을 닫아걸었었다.

 광부가 되려는 한 남자와 간호사인 한 여자가 독일로 흘러들어 사랑하고 결혼하였다. 그 부부는 채소가게로 성업 이루자 새로 산 벤츠를 타고 첫 여행을 떠났는데, 그 여행길에서 교통 사고로 일가가 나란히 세상을 떴다. 위암 말기 환자였던 나의 형제는 병실 창밖으로 몰려오는 봄을 바라보다 평화롭게 눈을 감았고, 유족이 된 나는 화장터에서 점화 버튼을 눌렀다. 조문 오지 못한 그의 애인이나 다름없던 기막힌 친구는 전방에서 눈사태에 죽어가는 동료 살리려다 눈에 묻혀 죽었다고 한다.

 

 누가 더 잘 죽었는가, 살아있는 나로서는 죽음에다 대고 한없이 찬성표를 던지고만 있다. 아, 살아있는 자들이여, 과연 누가 더 잘 죽어가고 계신지.

 

                                                - 시집 <극에 달하다>(문학과지성사, 2006)

 


 

 김소연의 시들은 ‘안’으로 상정되는 어떤 중심의 ‘바깥’에 서 있는 한 주변 존재자의 고독과 절망과 소외의 의식을 보여준다. 자의식에 가까운 시인의 이러한 감정들이 서로 융합·상승되면서 전체적으로 어떤 허무의 냄새를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정조는 개인 심리학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론적 지평 위에서 사회적인 의미 차원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 고독과 절망과 소외감은 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또 일시적인 허탈감이나 냉소주의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시인의 허무 의식의 뿌리는 어떻게 해서도 주변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존재자로서의 자기 한계에 대한 인식과, 또 안과 바깥은, ‘너’와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근원적인 세계 인식에서 발원한다. 여기에서 세계란 어떤 추상적인 보편 개념이 아니라 시인이 현재 몸담고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상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에야 이 시집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의미망들은 온전히 해석될 수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김소연의 고독과 소외의 의식은 실존론적 차원의 감정 형식으로서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 속에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하략) - 김진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