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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숨길 수 없는 노래 / 이성복(李晟馥)

by 언덕에서 2025. 3. 28.

 

 

 

숨길 수 없는 노래

                                                 이성복(李晟馥,1952~)

 

 

【숨길 수 없는 노래 1】

 

어두운 물 속에서 밝은 불 속에서

서러움은 내 얼굴을 알아보았네.

아무에게도 드릴 수 없는 꽃을 안고

그림자 밟히며 먼 길을 갈 때,

어김없이 서러움은 알아보았네.

감출 수 없는 얼굴 숨길 수 없는 비밀

서러움이 저를 알아보았을 때부터

나의 비밀은 빛이 되었네 빛나는 웃음이었네.

하지만 나는 서러움의 얼굴을 알지 못하네.

그것은 서러움의 비밀이기에,

서러움은 제 얼굴을 지워버렸네.

 

 

【숨길 수 없는 노래 2】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숨길 수 없는 노래 3】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두 개의 다른 줄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 빛에 눈먼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입니다.

 

 

【숨길 수 없는 노래 4】

 

내 그대를 떠난 날부터 그대는 집을 가졌네.

오직 그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

그대의 무덤.

 

난 그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네.

오직 그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

내 떠나므로 불 밝은 집.

 

내 그대를 떠난 날부터 그대는 집을 가졌네.

상처처럼 푸른 지붕과 바람처럼 부드러운 사면의 집.

 

내 그대를 떠남은 그대 속에 나의 집을 짓기 위해서라네.

상처처럼 푸른 지붕과 바람처럼 부드러운 사면의 무덤.

 

-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1990) -

 


 

인간의 존재 의의를 탐색한 이성복(李晟馥)의 서정시이다. 이성복은 1977년 [문학과 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이후 모더니즘적인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로 1980년대 시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화려한 수사와 번득이는 비유는 1980년대의 젊은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 시집으로 단번에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평론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 뒤 6년만에 펴낸 <남해금산>(1986)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 달리, 고통스럽지만 깊고 따뜻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숨길 수 없는 노래>가 실려 있는 <그 여름의 끝>(1990)은 김소월과 한용운의 연애시 어법을 이용하면서도 좀더 심화된 사유를 보여주는데, 이 작품은 <그 여름의 끝>에 <숨길 수 없는 노래 1>부터 <숨길 수 없는 노래 4>까지 연작으로 실렸다. 1990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뒷부분은 소월시문학상 수상 당시와 약간 바뀌었다.

 

 

 인간 존재의 깊은 뜻을 탐색한 총 4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서정시로, 서러움은 나를 알아보지만 서러움은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나는 알 수 없고, 내가 서러움을 알 수 없으므로 숨길 수 없는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사상(思想)이나 관념의 형이상(形而上) 세계를 서정적 차원에서 노래하고 있는데, 이 시에 등장하는 '서러움'은 김소월ㆍ서정주ㆍ박목월 등 많은 선배 시인들이 시의 주제로 즐겨쓴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이성복은 이 주제를 이루지 못한 사랑의 좌절과 같은 내용으로 풀지 않고, 그만의 독특한 어법을 사용해 형이상의 단계에 이르렀다. 특히 이 시는 이성복의 시 전반에 흐르는 모더니즘 경향과는 다른 동양적 형이상의 세계에 접근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