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장편소설 『미성년(未成年, Podrostrok)』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Dostoevski Fedor Mikhailovich. 1821~1881)의 장편소설로 1875년 간행되었다. 『미성년』은 <죄와 벌>(1866)·<백치>(1868)·<악령>(1871)·<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80) 등과 함께 '도스토예프스키 5대 장편'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미성년』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한 청년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방황을 그린 성장 소설로서 삶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아버지 세대의 부재로 인해 온갖 불의와 도덕적 타락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위험하고 불완전한 상황에서 보호받을 수 없는 자식들에 대한 작가적 문제의식에서 쓰였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이자 일인칭 화자인 아르카디 돌고루끼가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작가의 자서전적 소설로 평가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해부한 도스토옙스키만의 독자적인 소설 기법이 충분히 발휘된 작품이다. 주인공 아르카디는 사생아로, 아버지는 베르실로프란 귀족이고 어머니는 소피야라는 하녀다. 아버지의 정실에서 난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귀족 대접은 물론 상류층 대우도 받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는 그가 처한 이런 개인적 상황과 러시아의 미숙한 사회체계에서 겪는 한 젊은이의 스무 살 우여곡절이 펼쳐진다.
소설의 역사에서 이 작품이 보여주듯 불륜만큼 자주 등장한 소재는 없다. 톨스토이는 “불륜은 모든 문학작품의 거의 유일한 주제”라고 단언했다. 당시 러시아 현실 속에서 불륜은 매우 ‘일반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대개혁’의 여파는 사람들의 일상과 가치관으로 파고들어 산업화·도시화·세속화는 전통적인 도덕률의 붕괴에 불을 지폈다. “모든 것이 깨져왔고 깨지고 있다. 몇 개의 덩어리로 갈라지고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산산조각이 나고 있다.” 청년층은 결혼을 벗어나야 할 굴레라고 생각했고,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불륜이란 묵인되어야 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혼율과 사생아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1892년부터 189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1,000명의 신생아 중 437명이 혼외 자식이었다는 통계까지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귀족의 사생아인 스무 살 청년 아르카디의 일인칭 회고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20년 전, 젊은 지주 베르실로프는 영지 정원사 마카르 돌고루키의 아내 소피야와 눈이 맞아 얼마 후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그 아들 아르카디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이다. 베르실로프는 마카르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두 아이를 마카르의 호적에 올린 뒤 양육을 맡겼다.
그 후 그는 유럽에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라한 집에 법적으로는 여전히 마카르의 아내인 소피야와 거주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긴 마카르는 순례자가 되어 20년 동안 러시아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사생아 아르카디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벌어 러시아의 ‘로스차일드’가 되는 일이다. 그에게 돈을 모으는 것은 철학이자 이념이다. 돈은 보잘것없는 인물까지도 최고의 지위로 끌어올려 주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목적은 생물학적 아버지 베르실로프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아르카디는 아주 어린 시절 단 한 번 힐끗 본 생부를 문자 그대로 ‘갈망’한다.
“베르실로프를 달라, 내게 아버지를 달라.” “단 한 번만, 꼭 한 번만입니다! 아시겠어요,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시겠지요?”
방황하는 아르카디에게 방향을 제공해 주는 것은 농부 마카르다. 마카르가 소피야를 찾아오면서 소설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부정을 저지른 아내와 아내의 애인, 그리고 원래 남편이 한자리에 모인다. 기묘하게도 온화하고 평화롭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마카르가 자신을 방랑의 길로 내몬 사람들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용서했기 때문이다. 아르카디는 새하얀 턱수염을 기르고 멋지게 백발을 휘날리는 노인의 명랑한 미소와 아주 푸르고 반짝이는 커다란 눈을 단박에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저는 벌써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마카르의 매력은 일자무식 농부의 순박함이나 수수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전 존재에서 묻어나는 극기와 겸손과 삶에 대한 기쁨이 아르카디를 끌어당긴다. 아르카디는 마카르의 모습에서 자신이 그동안 줄곧 찾아왔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가 목말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품격’이었던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그리고 더 나아가 러시아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들은 기품이 없어요.”
생물학적 아버지 베르실로프의 귀족 혈통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고 원망과 복수심을 이겨내고 궁극의 자유를 획득한 인간이야말로 진짜 귀족이다. 아르카디는 마카르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 가슴이 기쁨으로 떨리고 뭔가 새로운 빛이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이 느껴지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그의 목표가 달라진다.
“나는 지금부터 고상함을 추구해 나가기로 했다.”
고상함을 배우기로 한 순간 아르카디는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건너간다.
주인공 아르카디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기숙학교에서 외롭게 자랐는데, 이후 어머니, 동생 리자와 함께 지내며 친부 베르실로프를 만나기 시작한다. 아르카디는 버림받은 자라는 생각이 강하고 귀족도 아니고 하인도 아닌 정체성의 혼란이 심하다. 그런 그는 귀족이 되고 싶은 마음과 귀족이 될 수 없는 비애로 인해 분열된 마음을 가진 자신에게 ‘거미의 넋’이 있다고 단정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심적 대립은 생부 베르실로프가 아르카디에게 그동안 자신이 유럽에서 방랑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간곡히 설명하자 풀리기 시작하지만, 설명이 허접해서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다.
베르실로프는 자신의 방랑이 러시아 특유의 우수와 러시아 민족과 인류가 추구해야 할 근본 사상을 깨닫기 위한 인고의 세월이었다고 말하며 마침내 그는 인류가 나아가야 할 황금시대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 황금시대의 지상천국은 신들이 시공간에 내려와 인간과 평화롭게 지내며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곳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후 베르실로프는 소피야에게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만, 형편없는 이중적 인간이어서 마음 한곳에서는 노 공작의 딸을 사랑한다. 그의 불타는 사랑은 증오로 연결되어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하려 하자 여자를 총으로 죽이려 하지만 아르카디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베르실로프는 소피야의 정식 남편 마카르가 죽어가면서 유언한 대로 소피야 곁으로 돌아와서 (격렬한 정열이나 사상에 시달리지 않는)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노 공작은 충격으로 죽고 까제리나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으며 아르카디는 대학에 진학할 결심을 한다. 노 공작이 재산 문제로 까제리나와 대립할 때 베르실로프의 딸은 노 공작이 자신에게 남긴 돈을 받기를 거절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다.
♣
이처럼 소설의 내용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이른 바, 막장 소설의 끝판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바트엠스에 머무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네 번째 장편소설 『미성년』을 구상했다. 이 소설은 이듬해인 1875년 1월부터 네크라소프의 잡지 ‘조국 수기’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해 5월부터 7월까지 다시 바트엠스에서 치료를 받으며 집필했기 때문이다.
『미성년』은 다른 대작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종종 받는다. 얽히고설킨 치정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지루한 소설이다. ‘5대 장편’에서 빼자는 주장까지 생길 정도다. 그러나 다른 네 편의 소설이 너무 막강해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보일 뿐, 『미성년』 역시 만만히 볼 작품은 아니다.
『미성년』은 불륜의 부도덕성을 심판하거나 결혼의 신성함을 사수하자고 외치는 소설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불륜을 저지른 남녀의 치정 이야기가 아닌 그들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의 양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친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소년이 자아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 『미성년』이라는 장편소설의 핵심내용이다. 청소년 교육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이 ‘불륜 소설의 탈’을 쓴 ‘교육 소설’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예의범절, 교양, 독서, 안목은 품격을 완성하게 이끄는 시작이다. 절제와 강인함과 너그러움과 자유로움을 배우고 익혀 자기 자신과 삶과 세계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때 품격은 획득된다. 학교와 가정에서 우리의 ‘미성년’에 가르쳐야 하는 내용도 바로 이런 종류의 품격이다. 그리고 그걸 가르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고상한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 :
<죄와 벌>(1866)
https://yoont3.tistory.com/11300809
<백치>(1868)
https://yoont3.tistory.com/11300808
<악령>(1871)
https://yoont3.tistory.com/11299430
<미성년>(187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80)
https://yoont3.tistory.com/1129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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