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장편소설 『그 후(それから)』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소설로 1909년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작품이다. 『그 후』는 나쓰메 문학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의 문학에서 '우정과 배신'이라는 삼각관계 소설의 원형을 이룬다. 한 여자를 둘러싸고 두 남자가 불신과 질투, 사회적 개인적 윤리의 갈피에서 고뇌를 거듭한다. 작가는 사랑의 진행 과정이 아닌 인물의 내적 갈등에 집중하면서 이를 통해 당시 일본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 도쿄 제국대학 전임 강사로 재직하던 중에 소설가로 데뷔하였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보장받았던 제국대 교수가 무엇이 아쉬워 서른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당시 일본 열도에 팽배했던 서구 자본주의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기보다는 사회인으로서의 자기 몫을 다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볼 뿐이다. 실제로 나쓰메는 영국 유학 기간 중 연무에 휩싸인 런던 거리를 배회하며 ‘근대’의 모순과 암부를 목격하였다.
『그 후』에서는 도쿄 상공에 검은 연기를 쉴 새 없이 내뿜는 공장 굴뚝을 바라보며 암울한 시대 인식에 사로잡히는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40여 년 전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 정부 파견으로 영국 글래스고의 공장 지대를 시찰하던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공장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서 산업 혁명의 눈부신 성취를 목도하고는 절로 ‘아름답다’라고 토로했던 사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수동적인 근대화의 물결이 일본의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나쓰메의 지론은 그의 소설을 통해 형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 일본의 소외된 지식인들이 처한 곤경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명료하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그려낸 최초의 작가인 것이다. 나태한 생활을 즐기면서 음악과 미술에 탐닉하는, 철저히 반사회적인 주인공 다이스케를 통해 나쓰메는 본격적인 근대 지식인의 유형을 제시한다.
이 소설은 <산시로오(三四郞)>에 이어 <문(門)>에 계속되는 3부작의 하나로. <산시로오>에서 ‘무의식의 위선’이라는 문제를 다룬 작가는 이 작품에서 그것을 발전시켜 자신의 위선에 눈뜬 인간을 묘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그다음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 미치요(三千代)를 친구 히라오카(平岡)에게 양보함으로써 영웅적 행동에 만족하고 있던 나가이(長井)는 역시 미치요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자기를 깨닫는다. 즉,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와 미치요가 도쿄에 돌아온 뒤, 지난 시절 친구를 위해 포기했던 미치요에 대한 감정이 다시금 살아남을 느낀다. 더욱이 그녀의 결혼생활이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그는 그녀와 다시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
한편 아버지와 형, 형수는 지방 유지의 딸과 다이스케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쓴다. 결혼 문제의 압박과 미치요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던 다이스케는 결국, 미치요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고 아버지에게는 혼인 거절 의사를 밝힌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횡령, 어쩔 수 없이 번역을 통해 생활을 이어나가는 소설가 데라오, 아버지 나가이와 형 세이코의 의심스러운 행적, ‘닛토(대일본제당) 정경유착 사건’ 등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이들을 비판하던 다이스케도, 자신이 자연의 본능과 주체적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공급이 반은 해결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식인이자 이상주의자였던 다이스케는 결국 일자리를 찾으러 간다.
소설 끝부분에서 다이스케는 “오늘 비로소 자연의 옛날로 돌아간다”라고 선언한다. 미치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자연에 저항했던” 것이며,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의지의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사람”이 된다고도 말한다. 이는 다이스케가 주체적인 삶을 위해 내린 결단이고 관문이다. ‘도금’으로 점철되어 있던 자신의 삶을 새로이 ‘순금’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 소설에는 1900년대의 일본 지식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이스케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않고 집에서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유유자적 생활하는 ‘고등유민(高等遊民)’이다. 그는 ‘빵과 관련된 경험’을 가장 저열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을 ‘직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고귀한 부류로 치부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메이지 시대는 근대화의 구호로 점철된 시기였다. 서구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노동과 생산이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부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입신과 출세주의가 위세를 떨쳤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등유민을 자처하는 다이스케는 분명 반시대적이며 반사회적인 인물이다.
다이스케의 퇴행적이면서 자유분방한 삶의 양태는 이 소설을 세기말적 문맥에서 되짚어 보라고 요구한다. 많은 세기말 소설의 주인공들이 게으름을 구가함으로써 속되고 악한 부르주아적 삶의 정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인 다이스케도 무위도식을 부르주아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신적 우위를 지켜낼 저항 수단으로 치부했다.
다이스케는 러시아의 안드레예프나 이탈리아의 단눈치오 같은 데카당스적 기질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그림도 벨기에의 브랭귄이나 아오키 시게루의 작품처럼 탐미적, 장식적인 것을 선호한다. 또한, 선잠을 잘 때도 꽃향기에 감싸여 잘 정도로 향기에 대한 집착이 유별나다. 다이스케의 감각과 취미에 대한 딜레탕트적인 집착은 사회적 고립의 연장선에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분명 속되고 고약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19세기말, 데카당들의 퇴행적 모습은 ‘진보’에 대한 확고부동의 신념으로 넘치던 시대 현실에 대한 염증의 표출에 불과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쓰메는 다이스케라는 인물을 통해 근대 지식인의 유형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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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케는 친구의 아내가 되어 있는 지난날의 연인 미치요를 불행한 삶에서 구해 주기 위해 고민한다. 그는 인간이 범하는 사랑의 잘못과 그 보상의 모습을 추구함과 동시에 남의 아내를 뺏으려는 사랑의 행위가 세상의 도의적 비판을 넘어서서 객관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다이스케는 서양을 모방하여 피상적으로는 근대화하면서도 도의적으로는 봉건 잔재가 심했던 근대 일본문화의 허위성에 기만당하여 자기의 진실(자연)을 잃어버렸다. 그가 그 자연에 복귀하려면 이렇게 날카로운 불안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가는 각성한 지식인과 세속의 대립이라는 주제를 합쳐서 근대 일본문화의 허위성을 비판한다. 나쓰메의 ‘저회취미(低徊趣味)’에 커다란 심화가 보이는 작품이다.
「그 후」가 발표된 시점은 1909년이다. 구시대의 관습을 자연스럽게 따르던 당시, 다이스케의 행보는 꽤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현대인은 단지 오늘만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현대적 가치와 이념, 정신을 갖추고 독립을 쟁취하는 개인임을 나쓰메는 말하고 있다. 다이스케는 사회가 무조건 주입했던 ‘목적’으로 인해 ‘권태감’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결정과 경험을 통해, 그가 찾고자 했던 자기 존재의 목적과 주체적 삶의 방향을 찾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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