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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인생 / 최영미

by 언덕에서 2011. 6. 13.

 

 

인생

 

                     최영미 (1961 ~  )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이 시를 읽은 지는 20년 가까이 되는군요. 신문 문화면에 소개된 신간 기사를 보고 서점에 가서 이 책을 사서 여러 번 위의 시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저와 동갑나기인 여류시인이 이토록 심오한 시를 쓴다는 사실에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했더랬어요. 열차를 타고 차창 밖을 보면서 상념에 사로잡힌 기억들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요. 시간은 열차 레일(Rail) 위에 미끄러져 팽팽한 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의 인생살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것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저게 무슨 말인지 인생을 살아보니 알겠더라구요. 뭔가를 이루려고 애타게 몸부림쳐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허다한가 하면, 체념하여 돌아섰을 때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는 중대사들도 많지요. 저는 그러한 것들을 '운명'이라 칭하고 스스로 운명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친구들과 술자리를 할 때 단정적으로 이야기해버리지요. "아, 모든 것은 운명적이야, 너무도 운명적인..." 그래요. 그래서 이 시인은 전선 위에 내려앉은 그것을 하늘이라고 불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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