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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상 단편소설 『환시기(幻視記)』

by 언덕에서 2023. 1. 10.

 

이상 단편소설 『환시기(幻視記)』

 


이상(李箱, 김해경. 1910∼1937)의 단편소설로 1936년 발표되었다. 단편소설 「환시기」는 한 남성이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사람들의 얼굴을 비뚤어지게 보고 환각을 겪는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 '환시'란 존재하지 않는 물체를 실제로 물체를 보는 것처럼 느끼는 환각 현상을 의미한다.
 『환시기』는 그 서두에 적힌 ‘처녀가 아닌 대신 고리키 전집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독파했다는 '처녀 그 이상의 보배’인 '순영'이라는 '유식한' 여인을 중심으로 하여 송 선생이라는 위인과 '나' 이상이 펼치는 재담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순영의 실제 모델은 권순옥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작품이 모두 그렇듯이 자전적인 요소를 골격으로 하되, 몇 가지 기교를 사용하여 허구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이른바 ‘비밀스러움’을 유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환시기』는 '순영'이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한 '나'와 '송 군'의 삼각관계 갈등을 서술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의 사건은 나의 관념 속에만 한정되지 않아서 순영과 송 군 사이에서 실제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기능이 정지되어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회령과 삼포읍, 블라디보스토크와 동경 등의 도시는 관념상의 먼 도시로, 단지 먼 거리를 뜻할 뿐, 사건에 사실성을 부여하지는 못하고 있다.

 

1935년 8월 흥천사에서 열린 정인택과 권순옥의 결혼 사진. 권순옥 뒷편에 검은 양복을 입고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이가 이상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결혼한 지 한 달쯤 해서, 고리키 전집을 독파했다는 처녀 순영이 송 군에게는 은근한 자랑거리일 거라며 ‘나'는 생각한다. 송 군은 여편네의 얼굴이 삐뚤어져 보인다며 사 년 동안이나 순영을 따라다닌 ’나‘(이상)에게 그 사실을 몰랐었냐며 다그친다.

 장면은 바뀌어 사 년 전 여름, 어느 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어떻게 하면 가장 민첩하며 가장 자연스럽게 순영의 입술을 건드릴까, 자세와 거리를 생각하다가 순영의 얼굴이 왼쪽으로 삐뚤어져 보여서 행동을 접었다.
 어느 날 송 군과 술을 마신 후 그를 집에 보내고 순영이 일하는 카페에 찾아가서 고독을 호소하던 '나'는 그녀에게 송 군과 결혼할 것을 권유한다. 십 분 후 두 사람이 송 군 방에 도착하니 송 군은 음독자살을 시도한 상태였다. 나는 그를 병원으로 옮긴다. 그러나 순영을 사랑하는 ‘나’의 내면에는,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사랑의 열병에 걸린 친구인 송 군을 생각하면, 끊임없는 질투가 인다. 그 와중의 '나'에게는 해결되지 않는 아내 금홍과의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송 군과 나, 둘 중에 누구를 만족시키는 게 옳은가 하고 고민한다.
 ‘나’가 이러한 출구 없는 사랑의 쳇바퀴에서 내려오는 방법은, 예정된 시간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결말은 ‘나’는 송 군에게 그 환시를 바로 잡는 방법은 어찌해 볼 도리 없는 현실을 억지로라도 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며, 두 사람은 원근법으로 슬픈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왼쪽부터 김소운, 화가 이승만, 소설가 박태원, 그리고 정인택



 작중 화자에게 순영의 얼굴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보인다는 환시는 독자들에게 엉뚱하게 들리지만, 소설 속 ‘나’(이상)에겐 순영과의 관계를 더는 진전시키지 않고 바로 잡아가야 할 문제임을 암시한다.
 출구 없는 사랑의 쳇바퀴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화자 자신의 무기력한 생활, 희망 없이 되는대로 사는 자기 자신을 가감 없이 떠올려 봤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정된 시간의 기억이 등장하는 이유는, 만약 ‘나’와 순영이 결혼한다면 얼마 동안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오래지 않아 금홍이가 그녀 자신을 진저리 치며 가출하듯, 순영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지금 같은 생활이 반복적으로 이어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영이가 내게 얼굴에 침을 뱉어도 금홍이가 반년 만에 집에 돌아와도 ‘나’는 추궁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병적인 무력감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금홍이의 몸에 엎드리어 금홍이의 몸이 순영의 몸인 듯이 탐하며 욕정을 쏟아낸다(이 장면, 지나치게 집착을 보이는 사랑의 행위에서 금홍은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음을 직감할지도 모른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송 군이 아내 얼굴이 자꾸 삐뚜름하게 보인다는 장면은 몇 가지 뜻으로 다가온다. 하나는, 4년 전, ‘나’와 순영이가 깊게 사귄 것이 꺼림칙하여 그럴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고리키 전집을 독파한 여인조차 징징대는 것은 여느 여편네와 마찬가지라는 실망의 토로일 듯하다. 마지막은 소장한 책을 팔아야만 해결되는 극도의 생활고와 일제강점기하에서 지식인들의 증발한 양심에 대한 자책까지 맞물려, 세상사가 온통 삐뚜름하게 보이는 것을 의미할 듯하다.

 


 이 작품은 이상의 다른 소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상의 문학적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독특한 캐릭터의 심리 위주로 전개되는 작품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다. 이 작품에서 주제를 결정짓는 사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에피소드와 심리 서술에 의존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서술을 담당하고 있는 화자가 개성적인 인물이다. 순영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 등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독특한 인물의 성격을 고려하여 읽어야 한다. 이 글에 등장하는 낯선 표현법은 문맥만으로는 충분하게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일인칭 시점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내용이 매우 독특한 인물의 관점과 해석을 거쳐서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품의 구체적인 표현은 캐릭터와 연관해서 이해하여야 한다.
 작가 이상의 생활 패턴이나 정신세계는 여자가 바뀐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는 것이 아닐 듯하다. 이상이 아내(금홍)와 헤어지고 순영(권순옥)과 결혼했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포에 살다가 종로로 주소를 옮겨갈 정도일 뿐이다. 작가 주변인들의 증언을 종합하자면, 작가 자신을 ‘나’로 ‘순영’은 (권순옥), ‘송 군’은 소설가(정인택)를 모델로 했다(권순옥은 금홍이 가출했을 때 이상이 사귄 여자다)는 것이 중론이다. 소설 속의 ‘나’(이상)는 현재, 그리고 가까운 과거를 오가며 실제로 권순옥과 정인택,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사실과 허구를 혼합해서 적고 있다. 어쩌면 내게 순영의 얼굴이 삐뚜름하게 보이는 것은 환시가 아니라 ‘나’의 순영에 관한 버거운 감정이 역설적으로 표현된 건지도 모른다.
 이상의 소설 대부분에서 작가는 첫 문장에 주제를 암시하는 글이나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을 던지는데, 이 소설의 도입부는 고리키의 희곡인 <밑바닥>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다. <밑바닥>은 도둑, 병자, 창녀, 노름꾼, 알코올 중독자 등 삼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리키의 해당 작품(https://yoont3.tistory.com/11303126)을 읽으면 서두에 왜 이 글을 넣었는지, 그가 『환시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일지 파악할 수 있다.






권순옥은 이상이 두 번째로 개업한 카페 <학(鶴)>의 여급으로 처음엔 카페 주인인 작가 이상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상의 간곡한 권고와 정인택이 순옥을 사모하여 자살 소동을 빚자 정인택과 권순옥은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 소설 『환시기』는 이상과 정인택과 권순옥, 이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 거의 사실적으로 기록한 소설로 볼 수 있다. 즉 『환시기』에 등장하는 '송 군'을 '정인택'으로, '순영'을 '권순옥'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환시기』의 내용을 따라 당시의 일을 유추해 보자면, 금홍이 집을 나간 뒤 이상은 카페 ‘멕시코’의 여급인 '순영'을 쫓아다닌다. '순영'은 막심 고리키 전집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독파한 신여성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의 절친한 친구였던 '송 군'이 남몰래 '순영'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다 못한 이상은 '순영'에게 '송 군'과 결혼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면서 '송 군'을 한번 찾아가자고 해서 둘이서 찾아간다. 그랬는데, 문을 여니 유서를 남기고 '송 군'이 쓰러져 있어서 헐레벌떡 '송 군'을 들춰 메고 세브란스 병원까지 갔다는 내용이다. 이 일은 실제로 정인택과 이상과 권순옥 사이에 일어났던 일로 보이는 부분이다.

 

 


 

권순옥의 세 남자  : 이상, 정인택, 박태원


“나와 순영이 송군 방 미닫이를 열었을 때 자살하고 싶은 송군의 고민은 사실화하여 우리들 눈앞에 놓여져 있었다. 아로날 서른여섯 개의 공동(空洞) 곁에 이상(李箱)의 주소와 순영의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이 한 자루 칼보다도 더 냉담한 촉각을 내쏘면서 무엇을 재촉하는 듯이 놓여 있었다. (…) 나는 코 고는 ‘사체’를 업어내려 자동차에 실었다. 그리고 단숨에 의전병원으로 달렸다.”(이상, ‘환시기(幻視記)’)
 이상의 소설 ‘환시기’에서 ‘나’는 이상 자신을, 순영은 권순옥(권영희), 송군은 소설가 정인택을 모델로 했다. 권순옥은 금홍이가 가출했을 때 이상이 사귄 여성이다. 이상은 다방 ‘제비’가 파산한 뒤 부모의 집을 저당 잡혀 다시 인사동 카페 ‘쓰루(鶴)’를 인수하는데 이 카페의 여급으로 있었던 여성이 권순옥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리키 전집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독파했다”는 지적인 여성이었다. 1930년대에는 카페 여급들 중에 인텔리 여성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이상의 친구였던 정인택이 짝사랑하면서 이들은 삼각관계에 빠지게 된다. 권순옥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정인택이 위 대목처럼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권순옥과 정인택이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적은 것이 소설 ‘환시기’다. 이들 결혼의 사회를 이상이 보았다는 것도 당시 화제가 되었다.
 이 사실은 이상이 죽은 뒤 정인택이 쓴 ‘불쌍한 이상’(조광, 1939.12)에서 “이상이 그 야윈 어깨에 명재경각의 저를 걸머지고 밤 깊은 종로거리를 헤매던 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그때 이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고, 내 아내도 없고…”라고 언급되기도 했다.
 권순옥의 문단 남성들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그녀는 정인택과 두 딸과 함께 월북했는데 도중에 정인택은 병사했다. 그 후 그녀는 가족들을 남한에 둔 채 납북된 소설가 박태원과 재혼하게 된다. 정인택의 둘째 딸인 정태은의 회고에 따르면 박태원은 자상한 아버지였고 권순옥은 전신마비와 실명 등으로 고통받던 박태원을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또한 권순옥은 박태원의 구술을 채록하고 마지막은 직접 창작까지 해서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완성시켰다고 한다(정태은, ‘나의 아버지 박태원’, 문학사상, 2004.8).
 권순옥은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 작가들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던 이상, 정인택, 박태원 세 사람과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얽힌 여성이었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중앙일보] 2010.7/23자


정인택(鄭人澤. 1909∼1952) : 소설가. 서울 출생. 유명(幼名)은 정태양(鄭太陽)으로 언론인 정운복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박태원ㆍ윤태영ㆍ이상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상의 단편소설 <환시기>에서 ‘송 군’이 실제 정인택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상이 경영하던 카페 [쓰루(鶴)]의 여급 권순옥을 사랑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매일신보]와 [문장사] 등에서 기자를 역임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면 우리 소설들도 다양한 서술 양상을 보여준다. 정인택은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루는 소설을 썼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심리소설로 분류된다. 과잉된 의식 세계와 생의 무기력성이 그려지고 있거나 신변의 일상과 애정이 내부 초점화로 기술되고 있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은흙과 흰 얼굴> 등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정책의 이념을 허구에 반영하고 있는, 이른바 친일 문학으로 비판받는다. <색상자(色箱子)> <해변> 등도 친일적 색채가 매우 농후한 소설이다. 심지어는 나치를 찬양한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정인택 소설의 내용과 그의 문단 활동 및 교우 관계로 볼 때 사회주의적인 의식이 뚜렷한 작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6ㆍ25 전쟁 때 월북한 탓으로 ‘월북작가’라는 낙인이 찍혀 우리 문학 연구의 담론에서 외면되어 왔었다. 이제 그의 전 작품이 해금된 이상 그의 소설의 기법상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롭게 평가될 듯하다. 정인택의 소설집으로 1948년 금룡 도서에서 출판한 <연연기(戀戀記)>가 있으며, 그 외에 평론으로 <불쌍한 이상(李箱)-요절한 그들의 면영(面影)> <작중인물의 진실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