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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효석 단편소설 『장미 병들다』

by 언덕에서 2022. 12. 29.

 

이효석 단편소설 『장미 병들다』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의 사실주의 단편소설로 1938년 [삼천리 문학]에 발표되었다. 이효석은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보름 정도 근무하다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이때부터 작품활동에 전념하여 1940년까지 해마다 1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1933년 구인회에 가입했고, 1934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이라 할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인 「장미 병들다」, 장편 <화분>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받았다. 수필, 희곡 등 22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940년 아내를 잃은 그는 충격을 잊고자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이듬해 귀국했으나, 1942년 뇌막염으로 언어불능과 의식불명 상태에서 사망했다. 이효석은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1930년대 서울 풍경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극단 '문화좌'를 설립해서 지방 공연 첫 번째에 단원들이 사상불온이라는 이유로 일경에 검거된다. 단원들은 투옥되고 극단은 자연 해산되고 만다. 현보와 남죽은 극단이 해산된 뒤 서울로 돌아왔다.
 현보의 학창 시절에 남죽은 언니인 세죽이 운영하는 대중원이라는 서점에서 기식하고 있었다. 많은 독서와 재능으로 여러 가지 꿈을 꾸었던 남죽은 그야말로 한 송이 꽃이었다. 현보는 졸업 후 유학을 하였고 그동안 남죽과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극단 '문화좌'의 배우로서 등장한 남죽을 칠 년만에야 만났다.
 현보는 서울이 집이었지만 지방 출신인 남죽은 고향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차비를 구하지 못했다. 그들은 현보의 친구에게서 얻은 돈으로 술과 춤을 즐기고 끝내는 서로의 육체를 즐긴다. 그들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보는 부득이 그의 집에서 남죽의 차비를 구하기 위해 며칠간 서로 만나지 못한다. 현보가 차비를 마련해서 남죽이 있는 여관을 찾아갔을 때 이미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현보는 그녀가 어떤 사나이에게 몸을 팔고 그 돈으로 떠났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녀로부터 현보가 성병을 얻은 사실이었다. 그 아름답던 남죽에게서 성병을 얻은 것이다. 그는 남죽과 드나들던 바에 들어갔을 때 거기서 남죽의 몸을 샀던 사나이를 만난다. 그도 성병에 걸려 있었다. 그들은 씁쓸히 술을 마신다.

 

소설가 이효석 ( 李孝石 . 1907-1942)


 「장미 병들다」의 여주인공 ‘남죽’은 주인공 ‘현보’나 마찬가지로 한때는 헌신적인 좌익운동의 여투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몸과 마음이 아울러 병들어 버릴 만큼 윤락(淪落)했다. 그렇다고 한때 건강했던 자기의 과거에 대한 기억마저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데 그녀의 가장 큰 고통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어두운 시대의 벅찬 입김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생활은 나를 죽여요. 이 추위, 무서움, 공기가 나를 협박해요. 이 적막. 가는 날 오는 날 허구한 날 똑 같은 회색 하늘. 참을 수 없어요. 미치겠어요. 미치는 것이 손에 잡힐 듯이 알려져요.…….”
 이효석의 에로티시즘 소설들은 성적 개방 의식을 통한 인간성 회귀를 담고 있다. 그의 에로티시즘 경향은 성의 자연적인 개방과 이를 통해 인간의 생명력을 추구하려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작가 로렌스의 소설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작품은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하는 여인의 모습과 그러한 삶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38년 1월 잡지 [삼천리 문학]에 발표되었다. 작품 제목인 ‘장미 병들다’에서 장미는 첫째 청춘의 꿈, 둘째 여주인공 남죽을 가리킨다. 젊은 청춘들이 꿈을 꾸지만,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좌절되고 마는 것, 그것이 ‘병든 장미’의 뜻이자 소설의 주제이다. 이 무렵이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이다. 힘들게 기획한 극단이 식민지 당국에 의해 해체되어 버리듯 청춘이 꿈을 펼칠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한 제목이다.
 또한, 장미는 여주인공 남죽의 삶을 함의하고 있다. 그녀는 음악가와 영화배우를 꿈꾸고 진보적인 책을 읽고 운동을 주도한 깨어있는 여학생이기도 했다. 이 무렵만 해도 현보의 눈에 그녀는 생장해가는 열정적인 꽃이었다. 하지만 남죽은 서울에서 지내면서 꿈을 잃어버린다. 작품에서는 그동안 그녀에게 발생한 일이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7년 후 낯선 남성과 하룻밤을 보내고 돈을 얻어낸다거나, 성병에 걸려 있는 육체를 통해 환기될 뿐이다. 이러한 행적이 과거의 시간 동안 어떤 삶을 살았을지 예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결국, 여성의 성적 타락이 ‘장미 병들다’라는 제목의 또 다른 의미이다. 그래서 남죽은 두 남성에게 성병을 옮긴 타락한 여성처럼 형상화된다. 그러나 남죽이 성병에 걸린 것이 그녀의 문란한 생활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성병을 옮긴 당시 남성들의 여성 편력이 식민지 조선사회의 장미를 병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