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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현진건 단편소설 『불』

by 언덕에서 2023. 1. 16.

 

현진건 단편소설 『불』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단편소설로 1925년 [개벽] 55호에 발표되었다. 가난과 조혼 제도 때문에 겨우 열다섯 살에 시집간 ‘순이’가 빈곤과 시집살이와 남편의 학대 등의 쓰라림을 견딜 수 없어 원수와 같은 남편이라는 존재가 사는 방을 없애 버리려고 집에 불을 질러 버린다는 내용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걸작이다. 무지한 농촌 소녀의 비극적 상황을 그린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이다.

 1925년 초반의 한국 소설의 전반적인 문체가 줄거리 전달(서술체) 수준을 아직 벗지 못했음은 명백하고, 현진건의 단편소설 『불』에서도 이 서술체가 주축을 이루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진행 속도나 과정이 복선적이서 타 작품에 비해 탁월한 작품이다. 당시의 조혼 비판이나 인간 해방이 이 작품의 주제이지만, 해결 방식이 불을 질러 해당 공간을 태워 없앴다는 적극성을 드러낸다. 이는 이 무렵 이미 등장한 신경향파 소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점이 그 시대적 의미지만 그 적극적 행위가 주인공 순이의 자각되지 않은 발작적, 일시적 충동에 불과하다는 것에 한계점이 있다.

 

빙허 현진건(玄鎭健. 1900∼1943)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시집온 지 한 달 남짓밖에 안 되는 열다섯 살 '순이'는 낮이면 일의 고통, 밤이면 남편의 성욕에 시달린다. 어느 날, 잠이 어릿한 가운데 숨이 갑갑해짐을 느끼다가 바위가 덮친 것 같이 짓누르는 무게와 오장육부를 들쑤시는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차려 보니, 남편의 솥뚜껑 같은 얼굴이 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염치없는 잠에 취하기도 하고 무서운 현실에 눈을 뜨기도 하면서 시달리다 보니 유월의 짧은 밤은 어느새 새는 것이다.

 시어머니의 집 떠나갈 듯한 호통 소리에 '순이'는 몸을 발딱 일으켰으나 온몸이 욱신거렸다. 오늘도 아침을 짓고, 보리를 찧고, 점심을 지어 모심는 일꾼에게 밥을 날라야 한다. 국이며 밥을 잔뜩 이고 냇물을 건너던 '순이'는 현기증과 함께 쓰러지고 만다. 이윽고 눈을 떠 보니 그는 또다시 그 '원수 같은 방'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방을 뛰쳐나온 '순이'는 밥과 국을 못 먹게 만들고 사발을 두 개나 산산조각 냈다고 시어머니에게서 매를 맞지만, 그 매는 오히려 짜릿한 쾌감으로 변한다.

 해는 저물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지만, 한없이 서럽고 슬퍼서 눈물만 솟아난다. 그때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이 위로를 한답시고 하지만 오히려 지긋지긋한 느낌이 들어 '밤을 피할 궁리'만 앞선다. 밥이 익을 무렵, 부뚜막에서 성냥을 발견하고서 '순이'는 쌩그레 웃는다. 그날 밤, 그 집에는 불이 일어나고 불길은 삽시간에 지붕으로 번진다. '순이'는 근래 없이 환한 얼굴로 모로 뛰고 새로 뛰며 기뻐한다.

 

영화 [불],1978

 

 이 소설은 작가가 이전에 다루어 온 자전적 소재를 청산하고 하층민의 삶에 눈을 돌린 작품 가운데 하나로, 작가의 소설 중에서는 드물게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난한 집 민며느리로 들어간 어린 소녀 순이는 힘에 겨운 농사일과 남편의 과도한 성욕, 시어머니의 몰이해와 학대 등을 견디다 못한 집에 불을 지르는 행동으로 반항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주제는 한국적 조혼(早婚) 제도의 비판과 인간 해방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소극적이 아니라 불을 질러 태워 없애버린다는 점에서 적극성을 띠고 있다. 다만 그 행위가 주인공 순이의 자각되지 않은 일시적 충동에 불과하다는 점에 아쉬움이 있다.

 농사일이 한창 바쁜 유월의 농촌, 나이 어린 '순이'는 시집와서 많은 일에 시달린다. 육체적 욕심과 고달픈 생활에서 헤어나는 길은 집에 불을 지르는 길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방화하고 해방의 희열을 느낀다. 결국, '순이'는 농촌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 전통적인 관습 및 남성의 횡포에 '불'로 대항한 셈이다.

 

 

 이 소설은 구성적 측면에서 본다면, 쇠죽 솥에 불을 지피고 앉아 불붙는 모양을 흥미 있게 구경하는 '순이'의 모습을 통하여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암시를 보인 점, 샘물에서 송사리와 희롱하는 천진난만한 모습과 그 송사리를 태질하는 가학적 행동의 대비를 통하여 '순이'의 순진함과 이상 심리를 교차시키는 대목들은 그의 뛰어난 단편 소설적 기교를 보여 준다.

 열다섯 살 난 소녀가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피하는 방법으로써 선택한 방화는 그 어떤 동기에서 유발된 방화보다도 설득력이 있고 타당하다. 이 방화는 작가의 지나친 조작성이 드러난다는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분한 현실감을 갖는다. 그것은 시대나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저항 심리와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순이의 방화는 인간이 언제나 마음 깊숙이 감추고 있는 복수의 욕구를 선명하게 보여 주며, 새로운 삶의 공간을 희구하는 보편적인 인간상의 한 실체를 보여 주기도 한다.

 방화로 작품이 끝나는 것이 그 시대 계급주의 문학의 영향에서 온, 한 문학적 관습이 되다시피 했던 작품 경향이라 하더라도, 순이의 방화는 더욱 근원적인 욕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방화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순이는 그 시대의 궁핍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간의 전형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조건을 제시한 인물로 이해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플롯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순이의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욕구’였음도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