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 희곡 『유령(幽靈, Gengangere)』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1828∼1906)의 희곡으로 1881년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직전에 발표한 작품 ☞<인형의 집>(1879)이 결혼과 가정을 파괴한다는 사회적 비난에 대한 해답으로서, 만일 노라가 사회인습과 타협하여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 비극으로 발표 당시부터 막장 드라마 같은 줄거리로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요즘의 드라마에서는 흔해졌지만, '알고 보니 나의 오빠(비록 씨는 다르지만)'라는 비밀은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사건 전개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주목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에 있었다. 그러한 사상은 남편에 순종하여 가정을 지키는 것이 부인의 의무라는 가부장적 가치관을 무참히 깨뜨렸다는 내용으로 표현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알빙 부인은 남편을 추도하기 위한 기념관으로 고아원을 설립한다. 이 건물은 곧 개관되기로 되어 있고, 제막식에 참여하기 위해 알빙 부인의 오랜 친구 사이인 페르손 만데르스 목사가 알빙 부인 집에 도착한다. 알빙 부인은 만데르스 목사와 사담을 나누던 중, 자신의 남편, 알빙대위는 죽는 날까지도 타락한 생활을 해왔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녀는 타락한 남편의 유산이 아들 오스왈드에게 전해지는 것이 싫어서 그 돈으로 고아원을 설립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온 오스왈드는 자신이 유전으로 생각되는 불치의 병에 걸렸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오스왈드는 자신의 아버지, 알빙을 완벽한 사람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유전이라는 사실에 고민한다. 알빙 부인은 오스왈드에게 할 수 없이 알빙이 타락한 사람이었음을 밝히고 오스왈드의 병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오스왈드는 자신이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하녀인 레지네를 증인으로 삼고 싶어한다.
그는 레지네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이 병으로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켰을 때 레지네가 자신에게 독약(마약)을 줘서 고통스런 삶을 마감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알빙 부인이 레지네가 오스왈드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이에 동요된 레지네는 오스왈드와 함께 남기를 거부하고 알빙 부인 집을 떠난다.
이제 오스왈드는 병 때문에 마지막 발작을 일으키면 자신에게 약을 줄 것을 어머니, 알빙 부인에게 부탁한다. 마침내 오스왈드는 마지막 고통을 맞게 되고 알빙 부인은 그에게 약을 줘서 고통을 덜어 줄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약을 주지 않고 그가 고통을 이겨내기를 바랄 것인지 기로에 선다. 오스왈드는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환한 '태양의 빛'을 되뇌이며 스러져간다. 아들을 죽음을 지켜보던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유령에 둘러싸여 있다….”
「유령」은 입센 자신의 타 장편소설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하여 쓴 작품이다. 입센은 이 두 작품이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으나, 여러 모로 이 작품은 <인형의 집>의 주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든 작품이다. 입센은 사랑 없는 결혼과 인습이라는 '유령'이 아르빙 부인의 운명을 어떻게 망쳐 가는지를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결혼에 대한 보다 강렬한 문제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 「유령」은 결혼제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 같은 전통적인 사회관습을 공격할 뿐 아니라 자유연애를 옹호하고, 때에 따라서는 근친상간마저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입센의 지지자들조차 이러한 사상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장편소설「유령」은 입센이 '환경과 유전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가지 요소'라고 한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쓴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품이다. 과거로부터의 각종 '유령'들에 따라 현재의 삶을 통제하게 만드는 사회적 관습, 관행, 도덕관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감춰진 남녀 간의 관계들, 사회적 관습에 의한 금기사항들, 은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작품의 전체 분위기를 압도한다. 작품에서 보여준 입센의 극작기교는 사회관습이 만들어 놓은 도덕적 허구성과 위선을 공격하는 데 있어 매우 뛰어나다. 특히 산문적 대사와 평범한 일상 뒤에 담겨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아이러니는 시적인 배경과 어우러져 명작으로서의 생명력을 주고 있다.
♣
입센은 이 작품이 사회적 물의를 빚는 상황에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머지않아 사람들이 이 작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유령」 발표 이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프랑스와 독일에서 근대 극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그곳 연극인들이 가장 먼저 무대에 올린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 「유령」은 당시 수많은 젊은 극작가들에게 기법적인 면에서나 이론적인 면에서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희곡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한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유령」은 유전 ·근친상간 ·안락사 등을 다뤄 처음에는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혹평을 받아 각지에서 상연 금지되었다. 그러나 전작보다 더 철저하게 사회의 부패와 부도덕을 폭로한 문제작으로 평가되었다. 낡은 시대의 '유령'은 새로운 꿈을 꾸는 이를 붙잡아 몰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 "나의 욕망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비도덕도 허용된다."라는 구절에서 이기적인 마음가짐이 바로 「유령」의 근거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욕망에 매달렸던 방탕한 남편뿐만 아니라 목숨을 이으려 이복 여동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으려는 아들과 새로운 사상으로 살기를 염원하면서도 남편의 혼외녀를 하녀로 들였던 아르빙 부인 모두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낡은 질서가 이기심 충족을 내세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견인력을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거부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 점이야말로 이 시대의 유령을 없애는 길이라고 이 작품은 지적한다.
☞ 인형의 집 : https://yoont3.tistory.com/11302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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