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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입센 희곡 『유령(幽靈, Gengangere)』

by 언덕에서 2020. 12. 22.

입센 희곡 『유령(幽靈, Gengangere)』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1828∼1906)의 희곡으로 1881년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직전에 발표한 작품 ☞<인형의 집>(1879)이 결혼과 가정을 파괴한다는 사회적 비난에 대한 해답으로서, 만일 노라가 사회인습과 타협하여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 비극으로 발표 당시부터 막장 드라마 같은 줄거리로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요즘의 드라마에서는 흔해졌지만, '알고 보니 나의 오빠(비록 씨는 다르지만)'라는 비밀은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사건 전개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주목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에 있었다. 그러한 사상은 남편에 순종하여 가정을 지키는 것이 부인의 의무라는 가부장적 가치관을 무참히 깨뜨렸다는 내용으로 표현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노르웨이 해안가 마을에 사는 중년의 아르빙 부인은 애정이 없는 결혼에 못 견디어 가출한다. 그녀는 만데르스 목사의 설득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사회적 명성은 있으나 방탕한 생활로 몸을 버려 폐인이 된 남편의 시중을 들고 그의 사후에는 그 유산으로 남편을 기념하는 보육원을 세운다. (남편 아르빙 대위는 지역 내에서 나름 명성이 높은 이였다) 이후 그녀는 아들 오스왈드를 해외로 유학 보낸 후 하녀와 함께 산다.

 아르빙 대위는 방탕한 생활을 하던 속물로 지금의 하녀도 전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르빙 부인은 이후 계속 거짓으로 점철된 남편의 명예를 모르는 척 지켜왔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닮을까 두려워 해외로 보내고 말았다. 해외에서 예술을 공부하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의 유전병으로 추정되는 병을 얻어 돌아온다. 아들은 자유분방해졌고 배다른 누이인 하녀에게 추파를 보낸다. 때문에 아르빙 부인은 아들과 목사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만 결국 전통적 아내와 어머니 상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보육원은 불타버리고 파리 유학 중에 돌아온 아들 오스왈드는 아버지의 성병이 유전되어 실명하고, “어머니, 태양을 주세요.”라고 부르짖으며 미쳐 죽는다. 아르빙 부인은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남편처럼 방탕한 아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게다가 그 아들이 남편의 성병을 유전으로 물려받아 죽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유령에 둘러싸여 있다….”

 

 

「유령」은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하여 쓴 작품이다. 입센은 이 두 작품이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으나, 여러 모로 이 작품은 <인형의 집>의 주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든 작품이다. 입센은 사랑 없는 결혼과 인습이라는 '유령'이 아르빙 부인의 운명을 어떻게 망쳐 가는지를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결혼에 대한 보다 강렬한 문제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 「유령은 결혼제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 같은 전통적인 사회관습을 공격할 뿐 아니라 자유연애를 옹호하고, 때에 따라서는 근친상간마저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입센의 지지자들조차 이러한 사상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장편소설「유령」은 입센이 '환경과 유전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가지 요소'라고 한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쓴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품이다. 과거로부터의 각종 '유령'들에 따라 현재의 삶을 통제하게 만드는 사회적 관습, 관행, 도덕관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감춰진 남녀 간의 관계들, 사회적 관습에 의한 금기사항들, 은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작품의 전체 분위기를 압도한다. 작품에서 보여준 입센의 극작기교는 사회관습이 만들어 놓은 도덕적 허구성과 위선을 공격하는 데 있어 매우 뛰어나다. 특히 산문적 대사와 평범한 일상 뒤에 담겨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아이러니는 시적인 배경과 어우러져 명작으로서의 생명력을 주고 있다.

 

 

  입센은 이 작품이 사회적 물의를 빚는 상황에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머지않아 사람들이 이 작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유령 발표 이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프랑스와 독일에서 근대 극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그곳 연극인들이 가장 먼저 무대에 올린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 「유령은 당시 수많은 젊은 극작가들에게 기법적인 면에서나 이론적인 면에서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희곡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한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유령은 유전 ·근친상간 ·안락사 등을 다뤄 처음에는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혹평을 받아 각지에서 상연 금지되었다. 그러나 전작보다 더 철저하게 사회의 부패와 부도덕을 폭로한 문제작으로 평가되었다. 낡은 시대의 '유령'은 새로운 꿈을 꾸는 이를 붙잡아 몰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 "나의 욕망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비도덕도 허용된다."라는 구절에서 이기적인 마음가짐이 바로 「유령」의 근거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욕망에 매달렸던 방탕한 남편뿐만 아니라 목숨을 이으려 이복 여동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으려는 아들과 새로운 사상으로 살기를 염원하면서도 남편의 혼외녀를 하녀로 들였던 아르빙 부인 모두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낡은 질서가 이기심 충족을 내세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견인력을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거부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 점이야말로 이 시대의 유령을 없애는 길이라고 이 작품은 지적한다.

 

 

 


☞ 인형의 집 : blog.daum.net/yoont3/11302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