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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이오네스코 희곡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

by 언덕에서 2022. 9. 27.

 

이오네스코 희곡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

 

 

루마니아 출신 프랑스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1912∼1994)의 희곡으로 1950년 녹탕뷜(Noctambules)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단막으로 된 '반(反) 연극' 「대머리 여가수」는 희곡 기법에 혁명을 일으켰고, 부조리 연극의 시발에 이바지했다. 남성을 상징하는 대머리와 여가수를 결합한 역설적인 제목이 암시하듯이 현실의 부조리한 측면을 부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반(反) 연극’이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바 있는데, 등장인물, 언어, 형식 모든 면에서 기존의 연극적인 틀을 파괴하는 부조리극의 효시이다. 피상적이고 진부한 언어 표현을 비논리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진정한 대화가 단절된 인간관계, 인간들이 사물에 종속된 소외 상황, 일상의 표면적인 평온 속에 있는 불안 등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비극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이오네스코가 이룩한 업적은 추상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다양한 기법을 널리 보급하고, 연극계의 자연주의적 인습에 길들여 있는 관객들이 그런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게 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더욱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신랄한 독설을 잘 퍼붓는 훌륭한 비평가였기 때문이다.

 이오네스코의 평론집으로는 <논평과 반론>(1962)이 있다. 후기 작품들에서는 지적 모순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꿈과 환상 및 잠재의식의 탐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의 염세주의는 <왕이 죽다> 이후 약간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정치적 입장은 완고해져, 초기에는 '우익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지만 <단편적 일기>(1967)에서는 모든 종류의 좌익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런던. 어느 가정의 저녁 시간이다. 식사를 마친 스미스 부부가 난롯가에서 대화한다. 그들의 대화는 일상적인 듯 보이지만 무미건조하고 맥락이 닿지 않는다. 괘종시계가 일곱 번, 세 번, 다섯 번, 두 번 등 종잡을 수 없이 울린다. 하녀인 메리가 등장하여 마틴 부부의 방문을 알린다. 스미스 부부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마틴 부부가 마주 앉아 대화한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들이 부부임을 확신하고 포옹한다. 이때 메리가 조용히 등장하여 그들은 부부가 아니며 자신의 본명은 ‘셜록 홈스’라고 주장하고 퇴장한다.

 스미스 부부가 나와서 마틴 부부와 대화를 나누지만, 그 대화는 피상적이고 거의 의미가 없다. 초인종 소리가 연이어 울리는데 나가 보면 아무도 없다. 네 번째 초인종이 울리고 이번엔 소방 대장이 등장하여 일동에게 터무니없는 우화들을 들려준다. 메리가 들어와 기괴한 시를 낭송하다가 떠밀려 퇴장한다.

 소방관이 나가면서 뜬금없이 ‘대머리 여가수’의 소식을 묻는다. 이에 스미스 부인은 “그녀는 항상 같은 식으로 머리를 다듬는다”라고 대꾸한다. 소방관과 메리가 나간 후에 네 사람 사이의 대화는 더욱 부조리해져서 각자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문장들을 나열한다. 대화의 열기가 고조될수록 문장은 단조로운 음들의 반복으로 변하며, 흥분한 등장인물들은 다른 사람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질러댄다.

 광기에 가까운 아우성이 지난 후, 돌연 침묵이 찾아온다. 장면이 바뀌면 연극의 초반부 상황이 재등장하고, 이번엔 마틴 부부가 스미스 부부가 나눴던 대화를 시작한다.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자인 외젠 이오네스코는 1909년 루마니아의 슬라티나에서 태어났다. 1911년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으나 동생의 죽음과 부모의 불화,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불안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때부터 희곡과 시, 시나리오 등을 습작하기 시작했다. 1922년 이혼한 아버지를 따라 루마니아로 돌아가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1938년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이오네스코는 전쟁의 불안 속에서 출판사의 교정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틈틈이 첫 번째 희곡 「대머리 여가수」를 완성, 무대에 올렸다. 뒤이어 <수업>과 <의자>가 초연되었고 같은 해 희곡집을 출간하였다. 1954년 <의자>의 재공연을 계기로 주목받는 극작가로 떠올랐으며 <의무의 희생자><자크 혹은 복종><그림> 등의 희곡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1960년 <코뿔소>의 대성공으로 전후 현대 연극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가로 인정받았다.

 

 1945년 이후 파리에 정착한 이오네스코는 교정 담당자로 일하는 동안 영어를 배우기로 했다. 그가 공부한 영어 교과서는 문법을 철저히 지켜서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는데, 바로 이 교과서의 진부한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대머리 여가수」를 이루는 무의미하고 진부한 말들의 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연극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날씨, 사는 곳, 자녀 수 따위의 진부한 대화를 나누다가 실제로는 남편과 아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그가 되풀이하여 다룬 자기 소외와 의사 전달의 어려움이라는 주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이다. 그는 「대머리 여가수」의 '반 논리적' 개념을 발전시켜서 연이어 수많은 희곡을 써냈다. 작품 중에는 짤막하고 지나치게 불합리한 소품도 있지만,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일련의 단막극도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괘종시계의 타종은 객관적인 시간의 경과와 관계가 없다. 시계 종소리가 일곱 번 후에 세 번 울린다는 비논리적인 설정은 작품의 부조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갓난아이의 나이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스미스 씨와 그에 맞장구치는 부인의 모습에서 이들 사이에 조리 있는 대화는 있을 수 없음을 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