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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영화 <동주>와 '생각'

by 언덕에서 2017. 9. 6.

 

 

영화 <동주>와 '생각'

 

 

 

 

 

 

영화 <동주>는 이준익이 감독한 흑백 화면 영화로 2016년 2월에 개봉되었다. 시인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인 송몽규1의 일대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이며, 옥중에서 윤동주가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교차적으로 구성하여 진행된다. 이준익은 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든 것에 대해 컬러는 윤동주를 현재로 불러오는 듯한 느낌인 반면 흑백은 현재의 우리가 그 시대로 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윤동주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일제 시대의 북간도, 윤동주와 동갑내기 고종사촌지간인 송몽규는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시인을 꿈꾸는 청소년 윤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송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으로 건너간 송몽규는 더욱 독립 운동에 매진하게 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내성적인 윤동주와의 갈등이 깊어진다. 이 영화는 암흑의 시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를 화면으로 설명하며 진행된다. 

 제22회 춘사영화상 남우조연상 수상,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및 각본상 등 수상했다

 

 

 

<사진 좌: 윤동주의 연희전문대 졸업사진, 사진 우: 영화 <동주>에서의 윤동주 역 강하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윤동주가 태어난 곳은 북간도로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조선에서 이주를 하면서 이 지역에 한인촌이 생기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친구인 송몽규와 고종사촌 관계다. 송몽규는 공산주의에 심취한 학구열이 높은 중학생(요즘으로 치면 고등학생)이다. 이에 비하여 윤동주는 내성적이고 문학에 관심이 많다. 두 사람은 동시에 동아일보에서 주관하는 신촌문예에 도전을 했으나 송몽규만 합격하고 윤동주는 탈락된다.

 감수성이 풍부한 윤동주는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송몽규를 가장 가까운 벗으로 여기면서도 넘지 못하는 산처럼 느낀다. 연희전문대학을 졸업한 두 사람은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창씨개명한 둘(윤동주: 平沼東柱(히라누마 도오쥬우), 송몽규: 宋村夢奎(소무라 무게이))은 함께 교토제국대학에 응시하나 송몽규는 합격하고, 불합격한 윤동주는 입교대학에 입학한다(이후 윤동주는 동지사대학으로 옮긴다). 송몽규가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는 사실을 일경은 예의주시하고 그가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 윤동주와의 갈등이 깊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송몽규는 중국으로 떠나고, 1년 후에 경찰서의 감옥에 갇힌 모습으로 윤동주와 다시 만나게 된다(송몽규는 중국의 낙양에 있는 무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며, 그러는 동안에 독립 운동가들과의 우연한 만남 속에서 그들을 돕다가 경찰에 잡혔을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데려다 일본군으로 강제징용하자 유학생들은 이를 피하려 한다. 어느 날 송몽규 등 유학생의 독립운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된다.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도피할 것을 제안하지만 윤동주는 첫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송몽규를 먼저 보낸다. 그러나 윤동주와 송몽규는 불온사상을 이유로 일본군에게 붙잡혀 후쿠오카 감옥에 투옥된다. 생체실험을 당하던 둘은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1. 영화 <동주>에 대한 나의 생각

 

이 영화는 이준익 감독의 최신 작품으로 시인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다. 한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인 윤동주와 송몽규가 주인공이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시인이 될 수 없었던 윤동주라는 청춘. 윤동주는 시인이 되고 싶어, 시집을 내고 싶어 정지용과 이양하를 만나 동분서주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영화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윤동주와 송몽규가 겪어야 했던 가혹한 현실 속에서 꿈을 찾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는 중간중간 윤동주의 시를 스크린으로 내보내며 한 시인의 마음을, 한 청년의 마음과 시대의 정신을 떠올리게 만든다. 윤동주 시인의 반짝이는 시만큼이나 찬란한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흑백 화면으로 차분히 풀어내어서 보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 신예 배우 강하늘의 외모가 윤동주 시인과 흡사하여 몰입도가 깊은 영화였다. 아울러 송몽규 역할을 맡은 박정민의 연기력이 돋보인 영화였다.

 


2. 모두가 외면했던 어느 작가의 윤동주에 대한 생각

 

윤동주가 본격적으로 재발견이 된 것은 어제 세상을 떠난 마광수 교수의 영향이 컸다. 그는 작가로서는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문학연구가로서는 커다란 업적을 남겼는데 윤동주의 재발견이 그것이다. 윤동주의 시 연구는 1984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생인 마광수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학계로부터 인정을 받고 여러 매체에 인용되기 시작했다.

 마광수가 쓴 윤동주 연구논문은 완성도가 매우 높아서 한동안 윤동주 연구자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현재 교과서에서 인용되는 윤동주 작품 해설은 마광수의 연구내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감성인 '부끄러움'도 마광수의 발견이다.

 윤동주에 대한 마광수 생각을 그의 글을 통해 인용해본다

 

 (전략) 그는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나서 민족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죽었다. 그가 시를 쓰던 시대(1936~1943년)는 모든 사람이 시를 외면하던 때였다.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에서는 공습경보가 울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군가가 흘러넘쳤다.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이미지, 그리고 <병원>이나 <위로>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소외의식에 넘친 절망적인 몸부림은,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창백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한탄하는 윤동주의 처절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자연을 소재로 한 상징적인 어구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당시 문학인들에게 만연했던 현실 도피적 자연귀의와 아주 무관하진 않다.

 그러므로 윤동주를 저항시인이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의 시 어느 곳에서도 저항의 기백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가 옥사한 것은 어찌 보면 군사독재 시절 박종철 군이나 이한열 군의 죽음과 견주어질 만한 것으로, 시대를 잘못 만난 양심적 지식인의 억울한 비명횡사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회의와 혐오로 자신을 부정한, 어찌 보면 결벽증에 가까운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보고 낭만적인 폭음 또한 멀리했던, 당시로 보면 ‘시인답지 않은 시인’이었다. 기독교 가정에 기독교 학교로만 일관한 그의 환경이 그를 청교도적 죄의식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에 대한 애정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부정의식으로 변모하며 심리적 갈등을 야기한 흔적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 있다. <투르게네프의 언덕>, <간(肝)>, <쉽게 씌어진 시> 같은 작품이 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동주를 투쟁적 이미지의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깎이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스로에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의 가치가 정치적ㆍ사회적 상황과 함께 생각될 수는 없다. 시는 시인의 자기통찰과 자기연민, 그리고 본능적 욕구의 대리배설로 이루어질 때 한결 진솔한 감동을 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의 저항은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하 후략)

 

 - 마광수 저 <생각> 64~66쪽

 

3. 시대와 불화했던 마광수에 대한 생각

 

 

 

 

어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대와 불화했던, 작가가 있다. 윤동주 연구의 일인자...

 그는 “문학은 무식한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도하여 순치시키는 도덕교과서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문학이 근엄하고 결백한 교사의 역할, 또는 사상가의 역할까지 짊어져야 된다면 이는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율성은 질식되고 만다. 문학의 참된 목적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이요, 창조적 일탈인 것이다.”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지식인의 위선을 공격하였으며, 맹목적인 체제 옹호성 어용 문인들을 비판, 풍자하기도 했다. 또한 문학의 지나친 엄숙주의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가벼움을 경박함으로 그릇된 인식을 하는 경우가 많고, 설사 경박하다고 해도 그것이 의도된 경박성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다.” “소설 문장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일성어 또는 비속어일 경우 흔히들 그런 인상을 받는 것 같다.”며 한국문학의 위선성과 지나친 엄숙주의를 질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조식 양반 문학, 그리고 이념과 교훈으로 포장된 위선의 문학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워 왔다. 좌와 우를 상관하지 않고 성역 없는 비판을 감행했다.

 젊은 여성의 반짝이는 긴 손톱에서 성적 상징을 읽어냈던 90년대 초입 마광수는 ‘변태’ 소리를 들었고 법의 심판대에 서야만 했다. 그러나 네일아트는 젊은이들의 지배적인 문화 코드가 된 지 오래다. 아무도 섹스를 말하지 못했던 시절이어서 마광수는 야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한국 문학 최초로 여성에 성 주체성을 부여한 작가였다. 90년대 여성단체 대부분이 마광수를 비난했고, 검찰은 사라가 끝내 도덕적으로 반성하지 않았다며 유죄를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거대 담론에서 허우적거릴 때 개인의 가장 내밀한 욕망에 관해 발언한던 것이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자들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다. 자유주의자인 그는 획일적이고 답답한 세상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야한 여자’가 좋다고 하는 소설 때문에 교수 명예를 실추했다고 연금도 받지 못했다.  그 '대단하기 짝이 없는 교수의 명예'는 누가 정의한 것인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마광수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http://blog.daum.net/yoont3/11301533

 

마광수 시 <효도에>

http://blog.daum.net/yoont3/11299205

 

마광수 수필집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http://blog.daum.net/yoont3/11302258

 

   

 


 

 

  1. 1917년 9월 28일에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신자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였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의 장남이다. 시인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이다. 아명은 한범(韓範)인데, 아명으로 쓴「술가락」이 1935년 1월 1일자「동아일보」신춘문예에 콩트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그 뒤 1935년 3월 말에 은진중학교 3학년을 수료한 뒤 중국 낙양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는데, 동기생들과 함께「신민(新民)」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1935년 11월 경에는 남경을 떠나 산동의 제남에서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였다. 1936년 4월 10일에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경북도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9월 14일에 거주 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937년 4월에는 길림성 용정의 대성중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하였고, 1938년 4월 9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였으며, 1942년 4월 1일에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 전공에 입학하였다. 1943년 7월 10일에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 혐의로 검거되어 윤동주와 함께 1944년 4월 13일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5년 3월 7일에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눈을 뜬 채 세상을 떠났다. 1995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