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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2016년에 다시 만난 영화 <벤허>

by 언덕에서 2016. 9. 21.

 






2016년에 다시 만난 영화 <벤허>







미국의 작가 L.월리스의 역사소설 ‘벤허’는 1880년 발행되었고 부제(副題)는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배경으로 하여 같은 시대를 살아간 주인공 벤허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1959년 윌리엄 와일러가 당시 1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 <벤허>는 초호화 스펙터클 대작이었는데 막대한 비용만큼 많은 장면들이 감동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이 영화 <벤허>는 L. 윌리스의 원작에 충실했던 영화로 알려져 있다.

 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마차경주 장면은 절정을 이루는데, 이 소설은 출판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차례 연극화ㆍ영화화되어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 영화는 1959년 작품상을 비롯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 때문에 금번 개봉된 영화가 전작의 위용을 극복할 수 있을지 궁금증을 가지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전작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창 밖에서 떠들썩한 군악대의 음악소리가 들린다. 벤허는 누이동생 테일러와 2층 테라스로 나간다. 그리고 행진을 내려다본다.

 로마제국이 이스라엘 총독으로 파견한 새 총독 ‘그라투스’다. ‘로마의 앞잡이’ ‘로마의 간첩’ ‘로마의 셰퍼드’라고 길가에 모여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욕을 퍼붓는다.

 벤허는 그라투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몸을 앞으로 내민다. 그때 기왓장이 주르르 밀려 아래로 떨어진다. 하필이면 그라투스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앗!” 그 순간 그라투스는 말에서 떨어져 길바닥에 나둥근다.

 “이 녀석이 범인이다!“

 소리 나는 뒤쪽을 바라보니 메살라였다.

 “메살라, 좀 도와주게. 자네는 내 친구가 아닌가”

 그러나 메살라는 대꾸도 하지 않는다. 결국 벤허와 어머니, 누이동생은 체포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벤허의 집은 문에는 못질을 당한다. 그리고 ‘이 집은 로마 황제의 재산임’하는 표지를 붙였다. 집이 몰수당한 것이다.

 서기 24년 9월 어느 날, 로마 함대의 신임 사령관 아리우스가 나폴리 섬에 닿았다. 로마 황제로부터 「에게 해(海)」의 해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리우스가 탄 아스탈 호는 동쪽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120명의 노잡이가 배를 젓고 있다. 아리우스는 문득 60번의 노잡이를 주목한다. 아리우스는 그 노잡이를 불렀다.

 아리우스도 이미 벤허와 그라투스 사건을 알고 있었다. 해적이 나타나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스탈호가 부서지고 벤허는 바다 속으로 내던져졌다. 벤허가 널빤지 하나를 붙들고 헤엄을 치고 있는데 앞에서 아리우스가 두 손을 들고 얼굴을 물 위로 떠올리고 것이 아닌가. 벤허는 얼른 아리우스를 널빤지 위에 끌어 올린다. 그리고 둘 다 갤리선에 구조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벤허는 알리우스의 양자가 된다.

 벤허는 사막의 족장 ‘일데림’의 말을 빌려 타고 전차 경주에 참가한다. 자기를 불행의 구렁으로 몰아넣은 메살라와 겨루기 위해서다.

 “메살라 이겨라!”

 막젠티우스 총독을 비롯해 온 로마 사람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메살라 바로 뒤에 아테네 선수가 바싹 붙어서 뒤쫓고 있다. 메살라의 전차 바퀴가 아테네인의 말발굽을 들이받는다. 메살라를 비난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때 갑자기 메살라가 채찍으로 벤허의 말을 갈긴다. 말이 무서워 날뛰는 바람에 전차가 가우 뚱했으나 벤허가 곧 바로잡고 메살라 뒤를 쫓는다. 벤허가 메살라를 앞지르려 하자 메살라가 세차게 들이받는다. 이번에는 메살라의 전차가 넘어지고 메살라도 몸이 튕겨 나와 내동 이쳐진다. 그리고 메살라는 말발굽에 밟혀 불구의 몸이 된다.

 (위의 내용은 원작의 주된 이야기를 정리해 본 것이다. 원작의 이 장면을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이후 벤허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문둥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한다.

 

 

 

 

 2016년 티무르 베크맘베토브가 만든 <벤허>는 1959년 W.와일러가 만든 <벤허>와는 줄거리 상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스라엘 땅에 부임한 로마 총독이 '그라투스'가 아닌 '본시오 빌라도'로 나오는 것은 역사적인 '고증'의 결과일 것이다. 벤허와 비슷한 외모를 한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벤허와 대화하는 장면 등이 특이했다. 뿐만 아니라 전투선의 노예로 추락한 이스라엘 왕자 벤허가 로마 장군 '아리우스'에게 구출되지 않고 난파된 선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모습이나 유목민 족장의 신세를 지는 장면도 전작(前作)과 다른 부분이다.

 마지막 부분은 특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원작의 영향이든, 각색의 영향이든……. 그러니까 극의 클라이맥스라고 보이는 전차 경주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벤허가 중상을 입은 메살라에게 화해를 청하게 되고 벤허를 죽이려고 비수를 숨긴 메살라는 그에 감동하여 뉘우치고 곧장 포옹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극적인 재미를 위한 장치겠지만, 이런 철천지 원수끼리 갑자기 서로를 용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점이다.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유야 어쨌든 상대방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이에 불과하다.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도스트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류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군림하여 가르치려고 하는 설교조의 영화가 아직도 있다는 것은 그들(감독이나 제작자)이 그만큼 관객을 개나 돼지와 같은 우스운 존재로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959년 작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만든 영화 <벤허>가 좋았던 것은 극도의 표현 절제를 통한 간명한 메시지 전달이리라고 생각된다. 벤허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통하여 은근히 그리스도의 박애를 전달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얼굴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의 지나는 장면에서 그리스도가 잠깐 나타나는 정도이기에 <그 벤허>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한여름 인파가 붐비는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성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슬아슬함이 안겨주는 묘미 때문이다. 그러나 포르노 사이트에서 전라의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미모의 여성을 보노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같은 미모의 여성이지만 타자에게 보여주지 않아야 하는 것을 가리지 않는 그 노골스러움이 아름다움을 추하게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설정’ 자체만으로 감독의 메시지를 읽는다.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이가 예수로 등장하여, 벤허에게 설교하는 장면에서 ‘서구인(西歐人)! 너희들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조소를 일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