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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문열 대하소설 『변경(邊境)』

by 언덕에서 2015. 1. 13.

 

 

 

이문열 대하소설 『변경(邊境)』

 

 

이문열(李文烈. 1948 ~ )의 대하(大河)소설로 3부작 12권으로 완결되었다. 1986년 집필을 시작해 1998년 초판이 나왔고 2014년 개정판이 나왔다. 이문열 스스로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칭했으며, 모 문학평론가는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 쓴 소설이며 동시에 그렇게 깃든 작가의 혼과 장인적 열정이 빛을 발해 소설의 저 구석까지도 생동감으로 물결치는 소설”이라고 하며, 한마디로 『변경』은 대하소설이자 대하소설이 보여 줄 수 있는 바로 그것을 보여 준 한국문학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문제적인 소설이다(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국문과 교수))라고 했던 그 소설의 내용과 정체가 궁금했다.

 1986년에 집필을 시작해 1998년 초판을 발표한 이후 절판, 실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지 꼭 28년 만의 완성했다는 책을 지난해 말경인 11월 중고서점에서 12권을 구해서 틈이 날 때마다 꾸준히 읽은 결과로 연초에 마지막 권까지 읽을 수 있었다.

 작가가 말하는 변경의 개념은 지나간 시절의 정치학 교과서를 읽는 느낌으로 다가와 애매하고 모호했고 네 남매의 기구한 인생역정 스토리만이 소설적 재미로 기억에 남았다는 것이 대략의 소감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 자신을 포함한)네 남매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서 '변경'이라는 용어의 관념성을 창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변경』은 전체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 ‘변경’은 말 그대로 변두리라는 의미로 미국과 구소련으로 상징되던 두 제국의 끄트머리, 그 변경이 맞닿은 한반도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쪽에 남은 월북한 이동영의 장남 명훈과 차남 인철, 장녀 영희와 막내 옥경의 삶을 각각 따라가는 구성으로, 4·19가 발아된 1950년대 후반부터 ‘10월 유신’이 발동되던 1970년대 초까지가 배경이다. 저자가 1986년에 집필을 시작해 1998년에 초판을 발표한 이후 12년 만에 다시 펴낸 이 책은 《영웅시대》의 속편으로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1960년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국사회의 이 파란만장한 연대기를 배경으로 월북한 아버지를 두고 공통의 죄의식을 공유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세 남매 명훈, 영희, 인철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다. 월북자 아버지를 둔 한 가족의 신산스러운 가족사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 전개 과정의 어두운 측면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소설은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혼란과 무질서 혹은 정신적 무정부주의 상태를 극복하고, 지금, 이곳의 삶을 결정짓는 모든 질서와 제도와 정신적 중심이 형성된 그 시기의 현실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가족사 소설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이율배반적인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과 그것이 만들어 낸 복합적인 한국인의 삶과 사건들을 모두 포괄하며 비로소 현재의 한국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확인하게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국립대 농대 학장을 하던 좌익 지식인을 아버지로 둔 자식들이 있다.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1950년대 후반 미군 부대 일용직에서마저 쫓겨난 명훈은 뒷골목 주먹 세계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명훈은 사랑에 대한 강한 열망을 키우지만 첫사랑이 백인 장교와 결혼해 그를 떠나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후 만난 모니카 역시 명훈에게 집착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육체와 육체의 짐승적인 결합일 뿐이다. 주먹의 세계에서 벗어나려 하던 그는 끝내 정치 깡패, 황무지 개간, 여론조사소의 조사원, 술집 마담의 기둥서방, 도시 철거민, 광산 노역 등을 경험하며 빈민의 전형을 보여주다 의문사한다.

 자본주의의 화려한 이미지와 모든 인간적 가치를 무화시키는 물신화의 원리에 도취된 명훈의 여동생 영희는 순수했던 모습을 잃고 도시의 유혹과 매혹을 이기지 못해 술집 접대부가 되어 창녀에 가까운 매음을 하는 처지에 전락하기도 한다. 이후 건전한 가정 주부로의 발돋움을 위한 표독스러운 노력으로 가정을 이루고 돈에만 집중하며 자본의 노예가 되기로 한 영희는 복부인의 세계에 입성해 그늘진 성공을 맛본다.

 작가 이문열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셋째 인철은 어린 시절 가난으로 어머니와 형, 누나가 고향으로 떠난 후 극심한 굶주림을 겪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자리 잡는 동안 여동생 옥경과 함께 고아원에서 지냈고, 귀향한 후 농사일을 거들며 고입 검정고시 준비를 한다. 고등학교 입학 후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산으로 가출하여 헌책방 점원, 한의원 점원 등을 전전하다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한다. 이후 학교를 중퇴한 후 사법고시에 도전하여 실패하지만, 독서와 배움에 대한 포기 없는 노력으로 붕괴된 가족의 얼룩진 역사를 거대 역사와의 관계에서 인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문학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특정 세계의 전형성을 지니는 삼 남매와 달리 자신의 감정은 돌보지 않은 채 명훈을 사랑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 모니카는 1960년대를 형상화한 것처럼 어떤 것도 가늠할 수 없는 형체 없는 에너지로만 존재하여 술집 여자로 전전하다가 자살한다.

 인철은 언어를 통하여 현실을 인정하고 무질서한 현실에 현실과 다른 새 질서를 부여한다. 그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현실 속에 빠져 있지 않다. 이것이 문학이며, 인철과 이 소설을 승리로 끌어간다.

 

 

 이 긴 소설의 첫머리는 인철의 등굣길에 하이칼라 신사복 차림의 남자가 나타나 풀빵집에 데려가 아버지에 대해 묻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하이칼라가 소곤거리듯 “실은… 네 아버지의 오랜 동무란다”라고 말할 때 초등학교 5학년 짜리 어린아이는 “문득 세상이 고요해지면서 알 수 없는 한기가 온몸에 오싹 소름을 돋게 했다”라고 썼다. 아버지라는 말 자체에 짓눌려 잠시 멍해 있던 ‘철’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대답한 말은 “저는… 아버지가 없어요”였다. 경찰이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대경실색한다. 이 상황에서 아이들 아버지이자 지아비인 그 남자는 유령처럼 그들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일 따름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밤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도피한다. 남편은 이미 없는 존재로 치부했지만 나타나면 그게 더 큰 재앙이었던 것이다.

 월북한 가장 때문에 겪게 되는 한 가정의 파탄과 고난의 생활로 그 내용이 요약될 수 있는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심리적 억압이 어떤 문학적 질서를 창출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은밀하게 보여준다. 이른바 이데올로기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이문열의 '변경론'은 한국의 분단과 전쟁이 미, 소 냉전 체제의 산물이라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변경론'을 역사적 허무주의 또는 신식민주의로 비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정치적 무정부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문열에게 이 비난이 얼마나 유효하게 작용할지는 의문이다. 냉전 체제의 붕괴 이후 세계의 관심사가 힘의 논리에 입각한 정치적 파워 게임이 아니라는 '변경론 - 탈이념의 시대 담론'은 이념 혐오에 결과한 이문열의 생래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소설 『변경』은 변경인(이문열)이 고군분투한 탈이념의 현장 기록일 것이다.

 

 

 『변경』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다룬 1960년대 이야기다. 현대사를 다루는 대하소설 대부분이 1980년대 중심이거나 1960~80년대를 한꺼번에 다루는 반면 『변경』은 1960년대에만 집중한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는 1980년대가 만들었고 1980년대를 여는 열쇠는 1960년대에 있다.
 그러므로 1960년대는 오늘날을 만든 거대한 에너지가 웅크리고 있던, 한국 현대사의 빅뱅이다. 그런데 반해 역사적 소재로서의 1960년은 여러 방식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문학적 소재로서의 1960년은 미지나 다름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어둡고 깊은 시대를 살아간 세 명의 인물 명훈, 영희, 인철은 월북한 아버지라는 공통의 죄의식을 공유한 채 서로 다른 세계에서 1960년대를 만들어 나간다. 인철에 대한 이해는 곧 작가 이문열의 문학 세계와 그 뿌리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또 다른 관심을 유발한다.  

 『변경』은 또한 공간적 개념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작가 스스로 “거창하게 말하면 일종의 지정학적 장(場) 이론에 거칠지만 통시적인 제국주의론을 얼버무린 나 나름의 시대 인식 틀”이라 정리하는 ‘변경론’은 작중 인물들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쟁하는 세계관이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두 제국의 변경에 위치한 한국의 지정학적 비극과 그것이 만들어 낸 현대 한국인의 삶을 그리는 이야기는 세계의 힘을 분배하는 이념논리와 그것이 개인의 하루하루에 미치는 영향의 실체를 표현한다. 

『변경』을 문제작이라고 주장하게 한 보다 중요한 요인은 같은 시대의 것이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겉모습과 속모습이 서로 상이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율배반적이고 활한 한국근현대사의 흐름과 그것이 만들어 낸 복합적인 한국인들의 삶들과 사건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변경』은 한국사회의 이율배반성에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이율배반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통일적인 원리로 묶어 세워 결국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변경』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현재의 한국사회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지금, 이곳에 이르렀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세계 내적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12권의 장대한 분량으로 길어져야 할 내용과 주제는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추후 보완과 수정을 가한 이유이다.

 

 

 


 

 

☞소설 <영웅시대> : 이문열이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세계의 문학]에 연재했던 장편소설. 이 소설은 일제치하, 8ㆍ15 해방, 6ㆍ25를 전후한 민족의 격동기에, 이념으로 인해 고통받는 지식인과 그의 가족들이 겪어가는 시련을 통해 한국현대사의 실상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 작품은 크게 영남 대지주 아들이면서 해방 직후 남로당계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북에서 겪게 되는 이동영의 삶과 남쪽에 남은 아내 조정인과 그의 자식들의 고난에 찬 삶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명확하게 대비되는 작품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자기 삶을 던졌다가 현실체제 속에서 모순을 느끼고 좌절, 끝내 죽음을 맞게 되는 이동영의 삶이 중심을 이룬다. 작가의 자전적인 가족사에 기초하여 좌ㆍ우익 갈등의 문제를 형상화한 이 소설은 작가의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이데올로기적 허무주의)이 적극 투영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