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장편소설 『영웅시대』
이문열(李文烈, 1948~ )의 장편소설로 1982년 9월부터 1984년 6월까지 『세계의 문학』에 연재되었다. 1979년 중편 <새하곡>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후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하리>, <사람의 아들>, <변경>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었던, 1980년대 이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인기작가이다.
이 소설은 일제치하, 8ㆍ15 해방, 6ㆍ25전쟁을 전후한 민족의 격동기에, 이념으로 인해 고통받는 지식인과 그의 가족들이 겪어가는 시련을 통해 한국현대사의 실상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 작품은 크게 영남 대지주 아들이면서 해방 직후 남로당계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북에서 겪게 되는 이동영의 삶과 남쪽에 남은 아내 조정인과 그의 자식들의 고난에 찬 삶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명확하게 대비되는 작품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자기 삶을 던졌다가 현실체제 속에서 모순을 느끼고 좌절, 끝내 죽음을 맞게 되는 이동영의 삶이 중심을 이룬다. 작가의 자전적인 가족사에 기초하여 좌ㆍ우익 갈등의 문제를 형상화한 이 소설은 작가의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이데올로기적 허무주의)이 적극 투영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동영은 식민지 시대에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며 아나키즘에 심취하다가 사회주의로 전향한 젊은 지식인이다. 그의 어머니는 이동영의 아버지가 일찍 죽자 천 석의 살림을 떠맡아 <돌내골 암범>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여걸의 면모를 보이며 살림을 꾸렸다. 이동영이 대학시절 결혼한 아내 조정인은 처음 시집오던 날부터 암범으로 소문난 시어머니를 두려워하지만 딸처럼 대해주는 시어머니에게서 차츰 친부모와 다름없는 감정을 느낀다.
이동영이 서울 근교의 S시에서 농대 학장으로 잠시 재임 중 UN군이 밀려오자 그의 가족인 어머니와 만삭인 아내, 어린 자식 삼 남매를 두고 월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동영은 정치군관 훈련을 두 달여 동안 받고 어느 인민군 보병연대의 정치부 대대장으로 배속받아 찾아가는 중 안나타샤라는 인민군 여간부를 만난다.
이동영이 도착한 보병연대의 연대장은 뜻밖에도 자신이 동경 유학 시절 함께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 김시철이었다. 이동영은 아나키스트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김시철이 민족 해방 전사로서 최전선에서 전쟁을 겪는 동안 사회주의 이념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절대 권력자에 대한 우상 숭배와 권력 추구로 사회주의는 변질되고 있다고 김시철은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김시철은 출신 성분이 천석꾼 김창봉네 손자인 지주 신분이라는 것과 계보상으로 연안파(延安派)나 무정(武亭) 일파였다. 결국 김시철이 전투 중에 자살에 가까운 무모한 행동으로 전사하자 함께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당한 이동영은 이념의 혼란에 빠진다.
이때 이동영의 가족은 이동영이 월북한 직후 피난민에 섞여 서울로 들어온다. 의식주 해결이 어려워 전쟁 전에 자신들에게 신세를 지던 친척들의 집을 찾지만 이미 빨갱이 가족으로 소문나 있어 경찰과 동네 청년들에게 붙잡혀 수용소에 갇힌 후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어린 삼 남매는 서울 거리를 쏘다니며 하루를 어렵게 나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면회를 간다. 인민군 부역자의 가족들이 수용된 이곳에서 시어머니와 아내는 혹시 집단 처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견디기 어려운 심문의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지낸다. 결국 탈출을 결심한 시어머니와 아내는 두 남매만을 낙동강 근처의 외가로 내려가도록 한 후 해산을 빌미로 수용소 앞 빈집으로 옮겨 이후 탈출한다. 이 와중에 인민군의 무책임한 행동을 목격한 시어머니와 아내는 이동영이 가고자 하는 사회주의가 인민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에 조금씩 회의를 품게 된다.
이동영은 자신의 병실에 나타난 인민군 정치부 여간부 안나타샤가 중앙당 핵심지도부의 30인 중의 한 사람과 끈이 닿고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던 중에 동경 유학시절의 옛 스승 박영창을 만나게 된다. 박영창은 이동영과 김시철 등의 여러 학생들에게 아나키스트를 전파하다가 볼셰비키로 전향한 이동영의 정신적 지주인 인물이었다. 이동영과 헤어진 후 박영창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권력의 핵심부에서 점점 밀려 나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당의 이데올로기만은 장악하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
이동영의 가족은 중공군이 서울 근교까지 밀려오자 수용소에서 풀려나 서울로 들어온다. 시어머니와 아내는 탈진 상태에서 갈 곳을 찾다 소달구지를 타고 어렵게 친정에 도착하지만 정인의 친정아버지는 조금의 여비를 주며 이동영의 가족을 매몰차게 내쫓는다. 이는 친정아버지가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인민군 활동을 하게 되자 막내아들은 도피하듯 국군으로 나가 소식이 없고, 아버지는 빨갱이 아버지라는 이유로 곤욕을 치르며 생긴 불신과 불안의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이동영의 시어머니와 아내는 갓난아이와 삼 남매를 끌고 고향으로 향한다.
이때, 인민군이 서울을 재탈환하자 안나타샤는 완쾌한 이동영에게 인민군 정치부 서울지부장이라는 꽤 높은 직위를 맡긴다. 이동영은 동경에서 박영창의 노선을 함께 따르던 박영규를 서울에서 만나면서 이념에 대한 회의 더욱 깊어진다. 박영규는 자신과 같은 지주의 아들이 받는 불이익을 덜고 사회주의 투쟁 경력을 쌓기 위해 다른 동료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복역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중공군이 UN군에 밀리게 되면서 이동영은 전에 있던 S시의 지부장으로 옮기게 되자 한층 더 신분의 불안을 느낀다. 개성에 도착한 이동영은 곧 자신에게 숙청이 있을 거라는 안나타샤의 정보를 들은 후 군사위원회에 출두하여 그동안의 과오를 시인한다. 한편, 안나타샤의 정보에 따라 이동영은 숙청을 면하기 위해 군사위원회에서 교직원을 희망하여 원산의 농대 부교수로 임명된다. 그리고 안나타샤가 오래전 오송리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사모해 왔다는 걸 알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결혼을 위한 동거로까지 빠르게 진척된다. 이동영은 부교수로의 생활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에 회의를 느끼던 중 자신의 스승이었던 박영창이 찾아와 곧 남로당 계열의 모두가 숙청될 것 같다는 추측을 남기고 간다. 결국 이동영은 박영창을 포함한 남로당 계열이 모두 숙청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동영은 동거 중인 원산 정치부장 안나타샤를 통해 일본으로의 밀입국을 시도하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북한에 남는다.
한편, 고향으로 돌아온 이동영의 가족은 그런대로 어렵지 않게 하루를 살아가며 앞으로의 안정을 위해 기독교인으로 탈바꿈하려 애쓴다. 그즈음에 이동영의 옛 친구인 빨치산 강현석이 만삭의 여자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다. 조정인은 이 일로 1년형의 징역을 살게 되고 시어머니는 고향 땅과 집을 팔아 읍내에서 장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곧 친척에게 속아 사기를 당한 후 출소한 조정인이 국밥집을 차려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신세가 된다. 결국 시어머니는 이런저런 고생 끝에 암에 걸린 후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게 된다. 조정인은 그동안 시어머니와 나누던 이야기들과 유언에 따라 남편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앞으로 홀로 사 남매를 안정 속에서 키우기 위해 시어머니의 유언대로 기독교의 세례까지 받고 남편 이동영을 가슴에서 지워낸다.
장편소설 『영웅시대』는 6장으로 구성된 원고지 3천5백 장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작품의 배경은 한국전쟁이라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작가는 「영웅시대」라고 이름 지은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한 지식인이 겪는 사상적 편력과 현실발견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의 가족들이 그와 이별한 채 전쟁 속의 고난의 삶을 헤쳐가는 가족사도 다루고 있다. 지식인이 겪는 사상적 갈등과 전쟁 속의 가족의 고난이 서로 교직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것은 『영웅시대』가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에서 한 핵심적 요인이 되는 이념의 문제에 대해 과거의 어느 작품보다 치열하게 접근한 점을 유념해 보아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 이동영은 지주의 아들로서 아나키스트를 거쳐 남로당 중간급간부·인민군 중좌가 되는 사람이다. 작품은 주인공의 몰락과정을 그려갔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의 심화과정을 드러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작가 자신이 겪은 고뇌이기도 하여 동시에 모든 작가들이 부닥치는 벽이기도 하다. 장편소설 『영웅시대』는 ‘이념에의 단세포적인 혐오와 명목이 아니라 나름대로 치열한 이념비판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또 다음세대의 한국전쟁에 관한 소설을 위한 지평을 열었다는 호평과 단순한 반공소설에 불과하다는 혹평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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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의 내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말은 종종 피 묻은 칼이나 화약 냄새나는 총 같은 것과 비슷한 것으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차츰 철이 들면서 그것이 형체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다만 말이란 무책임한 그릇에 담긴 생각의 다발이라는 걸 알게 되자 이번에는 그게 이상해졌다. 어찌하여 그런 생각의 다발이 피 묻은 칼이나 화약 냄새나는 총이 되었는가? 그러다가 더욱 철이 든 뒤에는 우리가 거의 20년 동안이나 <사회생활>과 <공민>과 <일반사회>와 또 현대사에서 무슨 거룩한 종교처럼 믿어왔던 자유민주주의도 적에 대해서는 똑같은 역할을 해왔음을 알게 되면서 나의 이상함은 더 많은 가지를 쳤다. 이 아시아적 전제국가의 폐허 위에서 대규모로 일어났던 <지식인의 탈주>에 대해, 그들의 미혹과 방황, 독단과 편견에 대해, 설익은 사상의 독기와 일부 목적의 전도를 일으키는 이념 일반에 대해. 그리하여-그 모든 것에 대한 궁금증은 역시 그것들과 무관하지 않은 내 삶의 쓰라림과 연결되어 나의 얘기를 이루게 되었고, 마침내는 내가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왔을 때 가장 먼저 써야 할 '그 얘기'가 되고 말았다. -- 본문 중에서
이 소설의 끝은 '이동영의 노트'라는 부제의 긴 글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이동영은 이데올로기의 생성에서부터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분석하여 비판한다. '마르크스가 살아난다 해도 그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의 빈민굴일 뿐이다. 진정으로 그의 가르침에 감동하는 것도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 엘리트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소외된 지식층이거나 야심적인 몽상가들 쪽일 것이다. 만약 그가 사회주의 국가에 다시 태어난다면 틀림없이 자기주장의 많은 부분을 철회하거나 수정해야 할 것이며, 끝내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어이없게도 처형대뿐일 것이다. 죄목은 반혁명 또는 반마르크시즘.'이라고 말한다.
이동영은 이 뒷부분에 이어 '아들에게'란 이름으로 긴 편지를 쓴다. 아비의 시대는 윤리성과 자주성과 완결성이 결여된 '영웅시대'였지만, 너희는 휴머니즘과 민족주의를 추구하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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