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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문열 장편소설『아가(雅歌)』

by 언덕에서 2015. 1. 20.

 

이문열 장편소설 『아가(雅歌)』

 

 

 

이문열(李文烈. 1948~ )의 장편소설로 2000년 3월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장편소설 <선택> 이후 3년 만에 발표하는 작가의 장편소설로 정신적,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양파의 속처럼 쪼개진 동심원들의 집합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시대의 공동체가 거기에 속한 성원들에게 제 기능과 기호를 부여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처음 소설을 발표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감회를 밝혔을 만큼 작가 본인의 문학적 변모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아가』를 '교양 욕구에 지나친 배려를 보내는 일', '미문(美文)의 만연(蔓衍)함에 도취하는 일' 없이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한때는 우리들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사람', '험한 세상 바람을 탄 가엾은 풀씨 하나'처럼 모질게 살았던 여인의 희극적이면서도 슬픈 삶의 진상을 한여름 밤의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준다.  

‘아가1(雅歌)’의 뜻은 어원적인 해설로 보면 구약성서의 한 편(책)으로 그 내용은 남녀 간의 아름다운 연애를 찬양한 노래라는 뜻이다. 북한말로는 우아하고 고상한 노래로 해석할 수 있다. 발음대로 읽으면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 즉, 아가라는 의미로 보자면 주인공 당편이의 정신연령이나 행동이 어린 아가의 수준이므로 아가의 뜻은 이와 같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산업화 이전, 많은 사람들이 숟가락 하나 더 놓고 공동체를 유지했으며 몸이 불편하거나 약간 모자란 사람도 사람 역할을 하면서 그럭저럭 삶을 영유할 수 있었다. 그러한 시대에서 산업화를 거치며 사람이 생산수단이 되어버렸다. 기능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이 해야 할 역할이 더욱 커지고 심지어 그것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구조 하에서 장애인들이 사람으로서 역할을 하며 자신의 삶을 영유할 수 있는 자리는 없어졌음을 작가는 비판을 하고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 '오아시스'에서의 문소리씨와 소설 속 당편이가 오버랩되었다. 당편이는 이보다 더한 중증 장애인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해방이듬해 경북 영양 양반마을의 몰락하는 부자 녹동댁 대문간에 휴지처럼 버려진 당편이는 소아마비에 구루병을 앓는 중증 장애인이다. 발견 당시 열대여섯 처녀인 당편이는 도무지 사람인지 짐승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몰골로 일곱 살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

 녹동어른은 어울려 살아가는 게 사람이라며 생사가 불명한 당편이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당편이는 숟가락질도 제대로 못해 밥상을 일대 전쟁터로 만들기 일쑤였다. 외양간 옆 헛간에 거처를 마련한 그녀는 집안 허드렛일을 거든다. 어미 잃은 강아지를 따뜻하게 해 준다고 아궁이에 넣어다가 모두 태워먹는가 하면 병아리를 데리고 자다 깔아뭉개버리는 등 어리석지만 따뜻한 성품을 가졌기도 하다.

 그래도 녹동어른 갓 위의 지네를 잡아내어 '그(당편이) 눈이 가죽모자처럼 째진 것은 아닌 모양'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시산이 흘러 스물이 넘은 당편이는 동네 앉은뱅이 등과의 혼담(婚談)에서 연이어 퇴짜를 맞고 서른 살 넘도록 혼자 산다. 이후 녹동댁의 몰락 이후 갈 곳이 없어진 당편이는 녹동댁 며느리의 알선으로 장터 술도가에 허드레 심부름꾼으로 정착한다. 이때 지능이 좀 모자라는 총각인 술도가 배달원 황장군을 만난다.

 살림을 차리지만 성교(性交) 상대로써의 몸만 빌려줄 뿐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생활이고 아이도 낳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알코올중독자인 황장군이 의문의 사고로 죽고 세상이 변하자 오갈 데 없는 당편이는 마을 사람들의 회유로 인근 대도시인 대구의 장애인 보호소로 보내진다.

 그러나 몇 년 후 그곳을 탈출, 고향으로 돌아와서 동네 장터 상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연명하며 살아간다. 당편이가 오십 대 후반 늘그막에 만난 마른고기쟁이(건어물장수) 영감은 절름발이에 혀가 짧은 장애인이다. 둘은 단옷날 '당편이 법석'이라는 희극을 연출할 정도로 재미나게 동거하며 산다. 그러나 이후 영감이 죽자 당편이는 '아는 사람이 없어 싫어진' 그곳을 떠나 자청해서 장애인 보호소로 들어간 후 생을 마친다.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광기의 역사』는 근대 서구사회에 있어서 나병의 쇠퇴와 나병의 폐쇄에 따른 광인을 감금하는 장소가 개설된 사실에서 이론적 비판을 전개한 논문이다. '광기'의 개념이 형성되고 유포된 과정을 고고학적 방법으로 추적하여, 이성주의의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역으로 드러낸다. 어째서 이성은 비이성을 질병으로 치부했을까? 어째서 감금하고 억압하고 마침내 침묵 속에 가두었을까? 등에 대한 주목은 이성의 독단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타자/외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우리 곁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정신병원과 각종 수용소, 재활원, 보호소 같은 시설들이 그들 중 생산 능력이 없으면서 사회의 미관과 편의만 해치는 이들을 먼저 골라 데려갔다. 그리고 예전의 환유 대신 구호 대상자, 정신병자, 심신미약자, 장애인, 지체부자유자 같은 전문화되고 기능적인 호칭을 그들에게 부여한 뒤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 감추어버렸다. -- <아가> 22쪽

 소설의 주인공 당편이는 어렸을 때 가벼운 소아마비를 앓은 탓으로 손발이 자유롭지 못하다. 또 구루병의 증상도 있어서 목이 짧고 등이 굽어 어깨가 귀 가까이 솟아 있다. 키도 제대로 자라지 않아서 그녀는 성인이 된 뒤에도 초등학교 상급반이었을 때의 아이들보다 작다. 게다가 유인원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얼굴이 가슴께까지 묻혀 있어 어깨가 귀 위에 솟은 듯할뿐더러 어떤 때는 얼굴 길이가 그녀 키의 삼분의 일은 되는 듯 느껴진다. 그녀가 걸을 때는 크게 활갯짓하듯 오른팔이 휘익 앞으로 나가고 이어 왼팔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뒤따른다. 이때 몸이 약간 왼쪽으로 기우뚱하게 되는데, 그걸 바로 잡으려는 듯 다시 왼팔이 휘익 앞으로 내던져지고 다시 철퍼덕 오른팔이 나아가 간신히 처음의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면 표정도 득의를 드러내며 잠시 정상을 회복했다가 이내 두 번째 발걸음을 떼어놓기 위한 심각한 결의에 들어간다.

 이 소설은 이렇듯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집도 절도 없는 주인공의 일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아닌 무엇으로 공동체를 어떻게 변모시켜 왔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향리의 부락공동체를 도형으로 그리면 지름을 달리하는 동심원들의 겹 또는 양파의 횡단면과 비슷하다. 크게는 하나의 원이지만 그 안에는 기능과 성격을 달리하는 구성원들이 만드는 작은 원들이 여러 겹 들어 있다.

 맨 바깥에 있는 원은 문둥이의 오두막과 거지의 움막집, 백정의 도살장 같은 것들을 잇는 선이 된다. 그 안쪽에는 흔히 미치광이로 불리는 심신상실자와 백치 그리고 생산에 전혀 참여할 수 없는 중증의 불구자들로 이루어진 원이 있다. 그다음 원은 흔히 반편이로 불리는 심신미약자나 박약자, 또는 정신이 온전한 신체장애자들이 만드는 원이다. 마지막 원은 바보로 대표되는 지려천박자들이나 무슨 <둥이> 무슨 <쟁이> 하는 가벼운 편집증후군의 원이다. 그다음은 몸과 마음이 모두 성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중심이다.  당편이는 그 세 번째 동심원에서 삶을 시작했다. 그 향리에서 애초부터 그녀가 들어앉을 자리가 있었다는 것은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인 당시까지도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던 그런 부락공동체의 구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시각은 사회 속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어떤 기호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속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거기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 누구 또는 무엇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보자, 참말로 죽기는 죽었나'

 황장군의 얼어붙은 시체가 도가로 떠메어져 왔을 때, 당편이가 표정 없이 한 말은 그랬다. 그리고 정말로 확인이라도 하듯 숨결도 맡아보고 가슴에 귀도 대어 보곤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염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히려고 장군을 벌거벗기자 갑자기 장군의 아랫도리를 가리며 남의 일처럼 말했다.

 '에이구우, 참말로 죽기는 죽었구나. 살아 펄펄할 때는 팔뚝 같던 게, 인제 이게 뭐로? 똑 알라들 손가락만 하다'---191 

 이 작품의 '옥에 티’는 1994년에 발표되었던 단편소설 <황장군傳>의 내용 전체가 끝부분에 투입되어 전개되는 점에 있다.

 작가가 먼저 발표한 단편소설 <황장군傳>의 주인공 '황장군이 시대와의 불화로 독신으로 살다 의문사했다'는 내용에서 '황장군이 시대와의 불화로 독신으로 살았지만 술도가에서 만난 당편이와 얼마간 육체적인 관계로만 동거하다 의문사했다'는 정도의 내용으로 바뀌고 말았다. 무성의해 보이기도 하고 이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은 이에게는 다소 식상하기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공동체가 불구나 흠결의 껍질을 벗고 온전한 성원들로 이루어진 중심만 남았다는 것은 발전이나 진보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중심이 일체감으로 융합된 실체가 아니라 양파의 속처럼 쪼개진 동심원들의 집합일 뿐이라면 그 바깥의 동심원들이 벗겨져 나간 것은 크기의 축소와 보호막의 상실을 뜻할 뿐이다' --- 76쪽

 

 

 

  1. 원제는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이다. 8장으로 된 짧은 시가서로, 저자는 솔로몬으로 알려져 왔으나 본문 속에 ‘솔로몬’의 이름이 여러 번(1, 3, 8장)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솔로몬이 저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남녀간의 사랑의 시를 모은 것이어서 전체적으로 논리적 연관성은 거의 없다. 사랑의 시가 성서[正經] 속에 포함되게 된 이유는 이 책의 권두에 솔로몬의 이름이 있다는 점과, 내용에 종교적인 내용이 숨겨져 있다는 해석 때문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유대교(敎)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인간간의 사랑의 형태로 그려낸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집트의 연애시와 비슷한 점도 있어 역사상으로나 현재에 있어서나 이 같은 해석에 관해서는 많은 이론(異論)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가 [Song of Songs, 雅歌] (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