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이태준 단편소설 『아무 일도 없소』

by 언덕에서 2014. 10. 23.

 

이태준 단편소설 『아무 일도 없소』

 

 

 

월북작가 이태준(李泰俊, 1904 ~ ?)의 단편소설로 1931년 동광(東光)지에 발표되었다. 러시아에 체호프, 프랑스에 모파상, 미국에 오 헨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이태준이 있다. 이태준이야말로 우리나라 단편 문학의 완성자라 이를만하다. 이태준이 이룩한 예술적 성취는 단지 수려한 문장이 보여주는 기교나 서정적인 분위기라기보다는 그가 그려내는 선명한 인물상에서 비롯된다. 그는 시대와 환경의 그늘 속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존재들을 선명한 인간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었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복덕방>의 안 초시, 어리숙하지만 순박한 <달밤>의 황수건, <밤길>의 황 서방, <돌다리>의 아버지 등 이태준이 창조해낸 인물들은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는 시대 속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존재이지만 자기 색깔이 있는 분명한 존재로서 자리 잡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 소설 『아무 일도 없소』는 ‘불도 나지 안었소, 도적도 나지 안었소, 아무 일도 없소’라는 제목으로 1931년 <동광>지에 발표되었다. 이후 단행본 『아무 일도 없소』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불도 나지 않고, 도적도 나지 않은, 그래서 아무 일도 없소 라는 것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일제 치하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치열한 투쟁이 필요한 것인가를 이면에 내포하고 있다.

 

 

소설가 이태준(1904 ~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31년. 경성. M잡지사의 신출내기 기자 K는 종로에 위치한 신정 유곽을 르포하는 업무를 맡게된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그로서는 이것이 자기의 수완을 드러내 보일 첫 과제인 것에 더 신경이 초조하였다. 유곽에 가서 창부나 밀매음녀를 만나더라도 문학청년식으로 센티멘털한 감정을 가져서는 좋은 기사 발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받은 뒤였다.

 K는 유곽의 창부들 속에 15살 전후의 어린 소녀들이 많은 것에 놀랐다. K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여자에 흥분을 느끼기보다 측은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아까 편집국장의 주의가 이런 때의 그의 심리를 경계함이거니 하고 그 여자가 하라는 대로 따라해 보았다. 서슴없이 저고리를 벗는 여자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다시 놀라고 말았다. K는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이 흥분했지만, 다시 그의 나이를 물어볼 용기 없이 1원짜리 지전 한 장을 빼어놓고 그대로 나오고 말았다.

 유곽을 도망 나온 K는 근처의 어두운 골목, 남의 집 담장 밑에서 밀매음녀 한 명을 발견하고 그 뒤를 쫓아갔다. K를 유혹하던 그녀는 한일합방 이전에는 충청도 서산고을 사또의 딸이었던 젊은 여인으로, 생존을 위해 밀매음녀로 전락한 과정을 듣게 된다. K는 그녀가 어머니 송장을 안방에 두고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길거리를 나선 병든 사회를 깊숙하게 목격한다.

 k는 밀매음녀라고 신문에 났던 그의 사정 얘기를 듣고 눈이 뜨겁고 콧잔등이 뻐근해 오는 것을 누르며, 얼마 안 되는 시재를 털어놓고 서둘러 그의 집에 뛰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위해서 칼이 되리라 한 그 붓을 들고 자기는 무엇을 쓰러 나섰던 길인가? 고약한 놈이다!」스스로에게 양심의 칼을 들이대고 만다. (16쪽)

 

 

 

 

 기자 홍성민은 『유곽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태준의 『아무 일도 없소』의 소설 속 묘사에서 종로 근처 병목정에 있던 ‘신정 유곽’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고 썼다. 1904년 서울 남산 쌍림동(현 중구 묵정동 소피텔 앰버서더 호텔 인근)에 설치된 서울 최초의 공창 지역인 '신정 유곽'은 일장기를 대문에 걸었을 뿐 아니라 만국기로 내부 치장을 한 곳이기도 했다.

 당시 사실주의나 모더니즘 소설 속에서 유곽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모티브였으며, 꼭 언급해야 할 배경이었다.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서민들에게도 유곽은 식민지 유흥의 대명사로 생활 속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유곽의 역사’143 ~144쪽)

 

 

 

 이 소설 「아무 일도 없소」에는 신출 기자의 취재에 의하여, 3ㆍ1운동 당시 대동단2(大同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망명한 애국지사의 딸이 생계가 어려워 창녀가 되었고,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지사의 아내가 자결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당시대의 세속적인 삶의 궤도는 잘도 돌아간다는 반어적 인식이 제기된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주제는 상당히 많은 편수에 이르고, 장편 <사상(思想)의 월야(月夜)3>(1946)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도 나지 않았소, 도적도 나지 않았소, 아무 일도 없소'. 고요할 수 밖에 없는, 그러나 평화로울 수 없는 일제 치하의 서민 생활을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로 대신 구현하고 있다. k기자는 심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기만 한 세상에 원망을 하고 있다. 이런 작가의 울분은 식민지 작가의 착실한 사회 현실 파악과 민중 고통에의 동참이며 그러한 의지가 지향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면 요즘은 어떤가?

 지난 2월, 서울 송파구에서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송파구의 한 반지하방에서 생활하던 세 모녀가 빈곤을 견디지 못해서 극단의 선택을 했다.

 '주인 아주머니께...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 모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도움을 요청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과의 말을 남긴 이들의 자살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불도 나지 않았소, 도적도 나지 않았소, 아무 일도 없소.'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에도 그래로이지 않은가?

 

 

 

 

 

 

 

 

  1. 상허(尙虛)는 6세 때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양친을 다 잃고 고아가 되었다. 9세 때 고향 용담 마을로 돌아와 친척집에 맡겨지고, 15세 되던 해 원산으로 달아난다. 1930년대 초에 서울 성북동 248번지에 올라와 살다가(현재는 그의 질녀-누님의 딸-가 살고 있다) 1946년 월북했다. 월북 작가 중 가장 행적이 묘연한 것이 이태준이다. 1955년 사상성의 불철저를 이유로 숙청당한 후 붓을 꺾고 지방 [노동신문]의 교정원으로, 나중에는 탄광에서 노년을 보냈다고 전해질 정도뿐 생사조차 불명이다. [본문으로]
  2. 1919년 전협ㆍ최익환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 전 일진회원인 전협과 최익환은 귀족ㆍ관료ㆍ유림ㆍ학생ㆍ의병ㆍ중ㆍ여자ㆍ보부상 등 각층에서 수만의 단원을 포섭하고, 인쇄기를 구입, 영업을 하면서 [대동신문]을 비밀히 발간하였다. 한편 전 법부대신 김가진을 고문으로 삼고 의친왕의 승인을 얻어 선언서를 인쇄, 상해임시정부에 연락,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열국에 호소하는 길을 열기 위해 김가진은 먼저 상해로 출발하고 그 후 의친왕이 상복으로 가장하고 안도까지 갔으나,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단원이 투옥되고 전협은 10년, 최익환은 5년의 형을 받았으며, 특히 의친왕 사건은 일본 조야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본문으로]</국사대사전.(백만사.1975)>
  3. 1941년 3월 4일부터 7월 5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태준의 장편소설.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에 일본 군국주의 체제는 노골적으로 한민족 말살정책을 진행시켰고, 전쟁 수행을 위한 총력적 친일만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유화적이거나 친일적 작품 활동만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개화파였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린 송빈이 겪게 되는 삶의 역정은 우리 민족의 그것과 일치하지만, 그의 성장 과정은 결코 민족적 자각이나 의식의 개발은 없고, 장은주와 사랑에만 매달려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