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장편소설 『백치(白痴, Идиот)』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Dostoevski Fedor Mikhailovich.1821∼1881)의 장편소설로 1867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쓰기 시작하여, 1868년 [러시아 보도(報道)]지에 연재되었다. 작가는 주인공인 미슈킨 공작을 그리스도와 같은 뜻의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서 구성하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친구 마이코프와 조카 소피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소설의 주된 의도는 ‘진실로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는 데 있다고 썼다. 그에게 완전히 아름다운 존재는 오직 한 사람, 그리스도뿐이었다. 지고의 도덕과 선한 의지, 바로 그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이라 여긴 것이다. 그가 『백치』의 초안에서 주인공 미슈킨에게 붙여준 이름은 ‘그리스도 공작’이었다.
작중 주인공 미슈킨 공작, 상인 라고진, 장군의 딸 아글라야, 사업가의 정부 나스타샤. 이 네 사람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엮여 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미슈킨에게 사랑이란 개인에 한하는 애욕이 아니다. 미슈킨은 인류 전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며, 인간을 수단이나 장애물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본다. 미슈킨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타고난 선함을 일깨운다. 나스타샤는 그의 진실한 말에 흔들리며, 라고진은 질투로 몸부림치면서도 그를 형제로 여긴다. 그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감화되어 외친다. “그런데 어째서 아까 나는 당신을 백치라고 생각했을까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안에서 언제나 궁극적인 구원은 바로 이런 사랑과 함께한다. 사회적 규범이나 계산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자체를 사랑하는 미슈킨 공작은 도스토옙스키가 추구하는 구원의 형상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미슈킨 공작은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닌 청년이다. 병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해 세상 물정을 모르는데다 소박한 성품 탓에 타인을 의심하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백치’라고 부르곤 한다. 발작을 일으키는 병을 앓던 그는 몇 년간 스위스의 정신병원에서 요양한 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열차를 탄다. 열차 내에서 미슈킨은 우연히 라고진이라는 사업가를 만나고 그의 정부 나스타샤의 사진을 보고 그 얼굴에서 호감을 느낀다. 이후 그는 욕망의 화신인 상인 라고진, 지체 높은 에반친 장군 집안의 딸 아그라야, 그리고 여주인공이며 불행과 능욕 속에서도 오만한 비극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나스타샤 등이 펼치는 인간정열의 드라마에 말려든다.
라고진은 오래전부터 나스타샤를 격렬하게 사랑해왔고, 돈으로라도 그녀를 소유하려고 한다. 미슈킨은 나스타샤를 괴로움에서 구해주고 싶어한다. 미슈킨에게 감동한 나스타시야는 공작의 미래를 위해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로고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예반친 장군의 막내딸 아글라야는 가식으로 가득찬 상류사회에 환멸을 느끼는 총명한 소녀이다. 그녀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미슈킨에게 관심을 갖고, 미슈킨 역시 아글라야에게 매료된다. 그러나 나스타샤가 라고진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번복하면서, 네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에 화해와 조화를 가져오게 하려는 미슈킨 공작의 사랑과 연민의 정신도 현실세계의 광란의 소용돌이 앞에는 무력하다. 라고진은 나스타샤를 죽이고, 공작은 다시 스위스로 돌아간다.
이 작품에는 도스토옙스키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진실로 아름답고 선한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주인공 미슈킨 공작은 작가가 만들어낸 그리스도적 이상에 가까운 인물로, 사회의 규범이 아닌 선한 인간성을 따르기에 속물적인 사회에서 그는 ‘백치’일 수밖에 없다. 도덕적인 힘을 지닌 미슈킨 공작은 모든 인물의 가슴속에 사랑과 연대를 불러일으키며, 이는 이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샤로 이어져 진실한 선(善)과 구원을 완성한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1 중 하나다. 『백치』(1868)는 작가의 두 번째 여행 기간(1867~1871) 동안에 쓰인 것으로 1867년 봄 뻬쩨르부르그를 떠나면서 〈러시아 통보〉로부터 이미 선불금을 받은 상태에서 집필이 시작되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5대 장편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작품으로, 그는 완전히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을 구현하기를 염원해 왔고, 그 형상을 백치인 미슈킨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조연급 인물 레베제프에 의한 묵시록 해석, 라고진 가(家)에 얽힌 거세파(去勢派)신도의 그림자 등이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고, 주인공에게 작자의 지병인 간질 체험이 보태졌다.
『백치』는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작품으로, 그 독창적인 줄거리 속에 이 세상에서 무조건 아름다운 인물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 극히 설득력 있는 필치로 묘사하였다. 까뮈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일상적인 고뇌를 발견할 수 있다. 도스또옙스키만큼 이 부조리한 세계에 이토록 가까이에서, 이렇게까지 고통을 맛보게 한 소설가는 아마 찾아볼 수 없으리라.’
♣
그 만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은, 한번 그 세계 속으로 발을 들이고 나면 작가의 역동적인 재능의 매력에 푹 빠져서 숨이 멎을 듯한 소설적 흥미와 사상적 흥분의 회오리에 휩싸이게 된다. 다만 이야기에 동화되기 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나치게 위대한 예술적 천성으로 인한 특이성 때문에 큰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행히 이 『백치』는 그의 장편 가운데 가장 접근하기 쉽고 친근한 작품이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펼쳐 보이는 세계의 공공연하고도 은밀한 구석을 엿보게 된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평생 동안 그를 쫓아다녔던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화합과 이상을 실현해 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진정한 선과 미와 진실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여건, 니힐리즘의 팽배로 인한 기조노 사회 가치의 무용성과 도덕적 타락 등은 그에게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문제들이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주인공 미쉬낀 공작의 순수한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어린아이와 같은 지능을 가진 '백치'로 간주하게 한다.
속세의 때묻은 '어른'들과 때묻지 않아 백치로 취급을 받은 미슈킨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당대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연애소설이면서도 관능적인 데가 없고, 고상한 기품이 넘치고 있으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탐구하고 있는 점에 이 작품의 가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 :
<죄와 벌>(1866) https://yoont3.tistory.com/11300809
<백치>(1868) https://yoont3.tistory.com/11300808
<악령>(1871) https://yoont3.tistory.com/11299430
<미성년>(1875) https://yoont3.tistory.com/11302770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80) https://yoont3.tistory.com/1129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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