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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태원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

by 언덕에서 2011. 2. 7.

 

박태원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

 

 

월북작가 박태원(朴泰遠1909∼1986)의 장편소설로 한국전쟁 후 월북하여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태원은 193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소설가로 1930년대에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등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익산민란을 형상화한 <계명산천은 밝았느냐> 를 1963년에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대표적인 대하소설은 이의 후속편인 「갑오농민전쟁」일 것이다.  

 방대하기 작이 없는 이 소설은 1977년에 제1부, 1980년에 제2부가 발표되었고, 작가 사후인 1986년에 제3부가 출간된 3부작 역사대하소설이다. 박태원의 신병(身病)으로 인해 후반부의 상당 부분은 구술(口述)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에 발표된 역사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의 후속 작품으로, 이기영의 <두만강>과 함께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에 토대를 둔 이 작품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그 혁명적 성격 및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다.

 제1부는 1892년부터 1893년 겨울까지 전라도 고부군 양교리를 배경으로 하여 고부민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행해진 지배 계층의 폭정과 민중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그리고 있으며, 제2부는 1894년 7월부터 세 달 동안 고부민란이 농민전쟁으로 확대되기까지 전개되는 농민들의 투쟁을 서술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농민 세력의 해체와 영웅적 인물 전봉준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소설가 박태원 (朴泰遠1909&sim;1986)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임헌영․김재용 편, 한국문학명작사전, 한길사(1991)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제1부의 무대는 전라도 고부 양교리이다. 주인공 오상민 일가의 가난하고 굶주리는 정경은 마을 대부분의 양민 집들과 마찬가지로 탐관오리가 강요하는 가렴잡세와, 리진사 등 양반들의 가혹한 수탈에 의한 것으로서, 콩잎 팥잎으로 겨울양식을 삼을 형편이다. 1862년 익산민란의 주동자로 효수당한 오덕순의 아들 오수동은 그 일에 연루되어 쫓겨 다니는 형편이라 그 아들 상민이네 집에서는 죽은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오수동은 죽지 않고 황해도 금점판으로 돌다 서울로 와서 갑신정변 연루자와 연계하여 '일심계'를 조직하고자 분주히 움직인다.

 이즈음 조병갑은 금송아지 대감이라 불리는 민영환에게 7만 냥을 바치고 고부군수를 산다. 그는 그 돈을 보충하려고 갖은 명목으로 가렴잡세를 거둬들인다. 이를테면 남자아이에게도 군포를 물려, 애 밴 사람들이 아들 아니게 해 달라고 빌 정도이다. 양교리의 세도가인 리진사는 온갖 탐학 무도한 짓을 다해 양민을 종으로 삼고, 소작농을 괴롭힌다.

 그의 서자 리상무는 그런 리진사 내외에 대한 분노를 공부 열심히 해 출세함으로써 풀고자 했으나 서자에게 출셋길이 막혀 있음을 알고 좌절하여 농민 편에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가담하게 된다.

 그 무렵 보은에 모인 동학도들은 몽둥이 무장문제로 최시형, 손병희 등과 전봉준이 대립하고 나라에서 해산하라는 명을 내리자 허무하게 흩어져버린다. 이에 전봉준은 동학도에 대한 미련을 끊고 서울로 올라와 활빈당의 정한순, 일심계의 오수동과 연계를 맺곤 '척양척왜 보국안민'(斥洋斥倭 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한다.

 전봉준은 고향에 내려와 오상민에게 익산민란과 오수동의 소식을 전해주면서 앞날을 위해 칼 쓰는 법을 익히라고 한다. 상민은 친구 순돌을 도와 변산 활빈당과 함께, 빛 때문에 리진사에 종이 된 서분과 상월을 행차길 에서 빼낸다. 한편 리진사는 해산을 하려고 온 딸의 출산에 부정 탄다고 30여 년간 일하다 학질을 앓고 있던 문 서방을 한밤중에 버리라고 한다. 상민은 칼 쓰는 연습을 하고 오다 문 서방이 내침을 당한 것을 보고 업어 청렴강직한 의원인 강주부에게 데려다 살려준다. 이 소문이 나자 리진사는 충복 짝쇠에게 죄를 씌워 매질한다.

 한편 조병갑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렴주구에 힘써 고부백성들은 추수를 해도 빚만 지는 형편이고, 밥술깨나 뜨는 양민들도 죄를 뒤집어쓰고 재산을 몰수당하기 일쑤이다. 윤서방도 이중 한 사람으로 매 맞고 죽은 뒤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딸 영아와 할머니는 빈집에 들어와 살게 된다.

 상민은, 보막이 노역 후 쓰지도 않은 물세를 내라는 조병갑의 명을 거역하자고 동네 사람들을 선동하여 쫓기게 되고, 전봉준은 저간의 사정을 전주에 청원하기로 한다. 청원서의 장두 되는 일에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나서 잔혹한 매질 끝에 죽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떨쳐 일어날 각오를 한다. 

 제2부에서는 고부에서 불붙은 농민봉기가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확대되는 과정과 농민의식의 성장이 그려진다. 1894년 1월 10일, 농민군이 봉기하자 조병갑은 미리 기별을 받아 도망친다. 리진사가 도망간 후 그의 맏아들 상문이는 아비의 돈과 문서를 훔쳐서 몽득이를 말종 삼아 서올로 을라간다. 도망 중 리진사는 그에게 원한을 품은 소작농 길보에게 낫으로 찔리나 죽진 않는다. 몽득이는 상문에게서 말과 보따리를 빼돌려 전봉준을 찾아온다. 그날 밤 리진사의 하인들은 종문서를 소각하고 일부는 농민군에 가담, 일부는 변산으로 가기로 한다. 상민은 리진사네 곳간을 부수고 쌀과 피륙을 양민들에게 나눠준다. 이런 정황 중에 다른 읍들이 함께 일어나지 않아 전봉준 등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조정에서는 민비 척족을 중심으로 왜놈․양놈들의 간계에 놀아나고 밤낮 놀이와 매관매직으로 시절을 보내다 고부 소식을 듣고 조병갑을 처벌한다. 윤서방의 아들이며 영아의 오빠인 윤리섭은 끌려가는 조병갑에게 달려들어 그를 때리다 잡힌다. 조병갑 대신 고부에 파견된 안핵사 리용태는 역졸 400여 명을 끌고 와 무고한 양민들을 살육하고 더 심한 탐학상을 보인다. 뒷문으로 이리가 나가고 앞문으로 호랑이가 들어 온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봉준 등은 재봉기를 계획하고, 리상무는 노래를 지어 퍼뜨리고, 서울의 정한순․오수동에게 기별을 보낸다.

 드디어 1894년 3월 29일, 서울서 내려온 오수동은 가족과 상봉하고, 호남창의소 본부인 백산에는 죽창을 든 농민들이 모여든다.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파견하나 농민군은 황토현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반간계(反間計)와 소문 퍼뜨리기 수법 등으로써 더욱 승승장구한다.

 농민군의 기세에 눌린 홍계훈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해 달라고 조정에 상신한다. 전봉준이 전주 입성을 위해 떠난 뒤 상민의 총포대와 돌석의 창검대 등이 남아 장성싸움에서 대승하고 대포까지 빼앗지만, 그 와중에서 리섭이 전사한다. 그 즈음 서울의 리충식 선생은 고부 소식을 듣고 도우려 하나 힘이 없어 고민하던 중 민판서의 사사 제의를 거절한다. 그러던 중 김홍집의 제의로 영국인 게일과 조선 고대문화를 소개하는 일에 임해, 우연히 정동구락부에서 언더우드와 뻥커의 대화를 듣고 일 ․미 ․영․ 러 등의 제국주의적 속성과 마각을 알게 되어 일을 거부한다. 뜻있는 대관들은 농민봉기의 해결방도를 찾지 못하고, 리선생은 청일 파병의 지경에 이르자 앞날을 더욱 걱정한다.

 한편 농민군은 전주에 입성하게 되곡 전라감사 김문현은 놀라 달아난다. 이 입성을 구경하기 위해 상민 할머니, 어머니, 영아는 밤새워 와서 입성장면을 목도한 뒤 상민 할머니는 행복한 임종을 맞는다. 

 제3부에서는 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하여 기세를 올린다. 조정에서는 청국에 청병할 것을 결정하곤 설마 일본군이 함께 올까 하고 마음을 놓지만 이미 일본군은 출병태세를 갖춘다. 일병의 준동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전봉준은 고심 끝에 '전주화의'를 결심한다. 농민군이 전주를 내주는 대신 호남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권을 행사하는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일 양국군에게 철병을 요청하고 왕은 삼일포로 유람을 떠난다. 그러나 청․일양군은 철병 대신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여 친청파 민씨 일족을 내치고 김홍집 등 친일파를 내세운다.

 전주화의 후 폐정개혁에 힘쓰며 청․ 일간의 국제관계를 예의 주시하던 농민군은 일본군의 만행에 분기하여 다시 삼례에 모이게 된다. 비록 최시형 등 동학 북접 지도부에서 신중론을 펴긴 했으나 대세는 전봉준의 주전론으로 기울어져 관군․일군 연합군과의 싸움에 임하게 된다. 싸움 과정에서 전봉준을 구하려고 오수동과 길남이가 죽는다.

 양교리 집에서 상민이가 보낸 말 부루를 돌보며 전투연습을 하던 영아는 사랑하는 상민을 찾으러 공주로 떠나고, 상민의 어머니도 농민군을 도우려고 공주 관 군청에 들어간다. 영아는 자객의 손에서 상민을 구하고 자신은 죽게 되며, 상민의 어머니는 일본군 대포에 물을 넣어 못쓰게 만들고 죽는다.

 이 무렵 싸움은 일본군의 우수한 무기에 농민군이 당하지 못하고 피해만 내는 정황이 된다. 전봉준은 병이 나 산속에서 어느 현숙한 여인의 간호를 받게 되고, 노령싸움에서의 고전 후 농민군의 해산을 결심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관군․일군의 공격에 피해를 입고 괴로워한다. 전봉준은 집에 들른 후 서울로 가 훗날을 기약하려 했으나 상민이 염려했던 대로 도중 피노리에서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당하게 된다. 상민은 김경천을 찾아가 복수하고, 정한순은 전봉준을 빼내려 하나 일본군이 자기네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전봉준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상민 등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결의를 다진다.

 

 이 작품에서는 1894년의 농민전쟁이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사회를 극복하려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적인 변혁운동으로서,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견지하려는 민족운동이었음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오수동, 오상민 부자(父子) 등 농민 계층의 전형적인 인물의 설정, 풍부하고 세밀한 묘사 등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몇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무력투쟁의 옹호, 인물의 영웅성, 편향된 역사의식 등의 소설적 한계 또한 노출하고 있다.

 이것은 <갑오농민전쟁>이 혁명적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정될 수밖에 없는 한계라 할 것이다. 

 

 

 제1부는 1892년 12월 초순 호남벌 고부읍 양교리 오수동의 외아들 오상민의 집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오상민이 전봉준의 영향으로 의식이 각성되고, 사회적인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다루는 한편으로, 농민전쟁 폭발 전야의 각박한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제2부는 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고부에서의 농민봉기부터 전주성 진입까지의 3개월에 걸친 싸움을 다룬 것으로, 종교적 외피를 하고 있는 동학혁명의 본질을 계급의식의 시각으로 형상화했다.

 제3부에서는 관군과 그에 결탁한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이 싸워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문학]지에 따르면 박태원은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할 때까지 이태준의 비호로 평양문학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운과 함께 <조선창극집>을 출간했다. 1960년 작가로 복귀한 그는 1965년 망막염으로 실명했고 1975년께는 고혈압으로 전신불수의 불운이 겹쳤다. 그는 1963년∼1964년 ‘혁명적 대창작 그루빠’의 통제 아래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았느냐>를 집필했고 실명 후에 77년부터 대하소설 <갑오 농민 전쟁>(3부작)을 아내 권영희에게 구술해 1984년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