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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은미희 장편소설『비둘기집 사람들』

by 언덕에서 2010. 11. 3.

 

 

 

은미희 장편소설『비둘기집 사람들』

 

 

 

 

 

은미희(殷美姬.1960∼)의 장편소설로 2001년 발표되었다. 작가의 이력은 특이한데 광주문화방송 성우를 거쳐, [전남매일]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96년 단편 <누에는 고치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로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1999년 단편 <다시 나는 새>로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장편소설 『비둘기집 사람들』로 [삼성문학상]을 수상했다.

 

 

 

 모든 것들은 낮은 삶으로부터 좀더 상층에 있는 삶으로 나아가려고 꿈꾸며 발버둥친다. 그것은 우주적인 힘의 율동이다. 프로이트의 '고대의 잔재', 융의 '원초적이고 옛날부터 이어받은 유전적인 인간의 마음의 형태'도 같은 패턴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노자 '장자의 도(道)', '천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한 법칙(率)'이라고 한 주역에서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소설가 한수산은 <비둘기집 사람들>의 주인공들이 결국에 이르는 곳, 시간이 없는 자궁으로의 슬픈 회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소설의 끝 문장이 말해 주듯 '비둘기 여인숙'은 정적 속에서 숨을 죽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음지식물 같은 현대인들의 비가시적인 시공 속에 존재하게 된다.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청미를 위하여, 돌아가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많은 형만을 위하여, 매혈한 돈을 오렌지 주스 한 잔으로 마셔 버리는 수많은 열목과, 싸구려를 부르며 시장통을 누비는 많은 성우를 위하여, 행상을 하다가 개에게 물린 상처에다 된장을 바르는 많은 어머니를 위하여, 다시 태어나는 시공으로서의 그 바다와 자궁의 딴 이름인 '비둘기 여인숙'은.

 

 

 

 자, 그러면 이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비둘기'라는 단어는 여인숙 이름이다. 여인숙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을 여기에서는 '비둘기집 사람들'이라고 일컫고 있다. 여인숙 주인인 열목, 다방에서 일하는 청미, 길거리에서 옷을 파는 성우 등 장기 투숙객들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있다. 비둘기 여인숙 주인인 열목과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다방여자 청미와 그녀를 사랑하는 옆방 성우, 노회(老獪)한 아버지 김씨의 욕망에 결국은 이장을 죽이고 고향을 떠나온 사내, 이 네 사람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갈대는 갈 데가 없다'라는 표현처럼 작가 특유의 밀도 있는 문장력과 탁월한 어휘력이 구석구석 빛나고 있다. 김소진이나 서정주의 시에서 느꼈던 우리말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의 현재 삶은 허름한 여인숙에 투숙한 만큼 허름하다. 아픈 상처를 하나씩 안고 살며 그 상처를 치우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치지만 그들에게는 빛보다는 어둠만 찾아온다. 이 소설의 중심축이 되고 있는 성우와 청미의 공통점이라고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고 성실하고 정이 많다는 것이다. 성우는 성실하기 때문에 한푼 두푼 저축을 하며 밝은 미래를 그려보지만 청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애인의 꾐에 속아 섬으로 팔려가게 된다. 이런 청미를 구하기 위해 성우는 극력 노력을 한다. 돈을 준비한 후 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청미는 다른 곳으로 팔려가고 없다. 어찌 보면 삼류영화 소재에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기도 하지만 성우는 마지막에 청미를 구출하기 보다는 그곳에서 주춤하고 만다. 지독히도 가난하고 억센 운명에서 벗어나고픈 성우의 솔직한 욕망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청미를 찾아나설 것인가, 평범한 양지의 삶을 택할 것인가, 이런 망설임은 솔직한 인간의 내면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성우의 망설임이 자칫 건조하게 끝날 것 같은 결말에 탄력을 부여한다. 그들의 삶. 끊임없이 양지바른 쪽으로 가고 싶지만 그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음지의 곰팡이와 같은 존재들이다. 어둠의 순환. 왜 부자만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마냥 가난해야 할까? 왜 당하는 사람은 계속 당해야하고 등쳐먹은 사람은 늘 등쳐먹을 수 있는 것인가? 왜 사회라는 것이 그런 사람을 분별하지 않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이런 의문점들을 독자에게 던져준다. 운명적인이지만 이게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둘기 여인숙과 후줄근한 삶의 언저리를 방황하듯 살아가며 결국에는 술과 성적인 욕구에 미친 세상에 짓눌려 죽어가는 삶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따뜻함을 갈구한다. 그 따뜻함이란 가족애, 고향, 자궁에의 귀의. 지극히 고전적인 사유이면서도 현대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근원적인 갈구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