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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아리랑과 정선 / 김병종

by 언덕에서 2011. 6. 16.

 

 

 

 

아리랑과 정선

 

                                                                                                김병종 (1953 ~  )

 

                                                                                                                 

 

 

 

(정선 아리랑의 탯줄 아우라지 가는 길. 기차는 간이역 '여량(餘糧)'에 선다. 도회지로 가는 딸을 배웅 나온 듯한 어머니가 서 있다. 어여 그만 들어가시라고, 딸은 몇 번씩이나 손짓을 보내건만 어머니는 개찰구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그러다가 기어이 옷고름을 눈으로 가져간다.

 증산(甑山)을 떠난 기차가 잠시 머물렀던 또 다른 간이역은 그 이름이 별어곡(別於谷). 얼마나 이런 이별이 있어 왔기에 역 이름마저 '이별의 골짜기'였을까〔별어곡은 '자라 별(鼈)'자로 표기하기도 한다〕.

나를 내려놓은 두 량(輛)짜리 기차는 제법 벌판을 흔들며 떠나가고, 떠나간 자리 따라 억새풀이 일렁인다. 포플러 숲 건너편으로 반짝 물길의 한 자락이 보인다.

 역 앞 청원 식당에서 '콧등치기' 한 그릇으로 늦은 점심을 때운다.

 후루룩 먹다 보면 국수 가락이 사정없이 콧등을 후려친대서 콧등치기란다(겨울엔 따뜻한 국물에 말아서 '느름국'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메밀로 얼기설기 반죽하여 굵게 썰어 나오는 토속 음식 '콧등치기'는 다른 말로 '꼴뚜국수'라고도 부르는데, 정선에는 유독 후다닥 해치우는 이런 식의 '치기' 음식이 많다. 강냉이밥인 '사절치기'도 옥수수 한 알을 네 개로 만들어 밥을 지었대서 나온 말. 어차피 논농사 짧은 궁벽한 산 살림에 걸판진 음식 호사는 어려웠을 터이다. 오죽하면 '딸 낳거든 평창에 시집보내 이팝(쌀밥) 실컷 멕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정선은 원래 '신선 사는 깊은 산 속 도원경 같다.' 하여 그 옛 이름이 도원(桃園)이었다는 곳이다. 산 많아 경치 좋고 풍광은 좋지만 평야가 적어 가난은 숙명처럼 이어졌다. 호젓한 고개 하나를 넘어서자 발 아래로 반짝이며 흘러가는 물길이 나타난다. 저 강물은 언제부터 저기에 흐르고 있었던 걸까. 들국화 상그러운 길섶에 앉아 강을 내려다본다. 물길은 제가 떠나온 계곡을 잊어버린 듯 가을 햇볕 속을 무심히 사행으로 굽돌아 흘러간다.

 

 태산 죽령 험한 고개 

 가시덤불 헤치고 

 시냇물 굽이돌아 

 이 먼 길을 왜 가는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다 떨치고

 청려를 의지 없이 나 혼자 떠나가네

 십오야 뜬 달은 왜 이리 밝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오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릿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겨울 때마다 그렇게도 나를 좀 보내 달라고 절규처럼 애원하던 그 이상향 '아리랑'은 대체 어디일까. 산 넘고 강 건너 아득히 찾고 또 찾아가야 할 그 '아리랑'은 이승에는 없는 것일까.

 고갯마루를 내려올 때 문득 아리랑 한 가락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없다. 방금 넘어온 고갯길에 햇빛이 쏟아지고 있을 뿐이다. 유난히 고개가 많은 정선. 태백산맥 첩첩 산중 고개도 많아 '비행기재', '섬마령 고개' 다 넘어와도 '백봉령 아홉 고개' 넘다가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산이 많으니 자연 '고개'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비단 산길 오르내리는 현실의 고개만이 고개는 아닐 터이다. 변변한 땅뙈기 하나 없이 도란도란 세 끼 식사마저 자유롭지 않은 가난 속에서 삶의 무게를 지고 오르내려야 할 인생의 고갯길인들 오죽 많았을까.

 정선 아리랑은 그 태반이 여성들의 구전(口傳) 노동요. 천여 수에 육박한다는 가사들 중에는 독백처럼 자기 심정을 노랫말로 털어놓은 것이 유독 많다. 지금은 구절리(九切里) 깊은 산 속까지 도로가 뚫려 있지만 옛날의 정선은 한번 시집오면 평생 외지로 나가기조차 어려웠던 곳이다. 삶이 너무도 고단하고 힘겨울 때마다 나를 좀 보내 달라고, 아리랑 고개로 넘겨 달라고 노래로나마 애원했던 것이다.

 흔히들 우리를 한 많은 민족이라 한다. 그래서 한의 노래인 '아리랑'이 우리 땅 곳곳을 적시며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라고. 하긴 우리나라 아리랑은 우리나라 산천의 토종꽃 가짓수만큼이나 많다. 백 가지 넘는 아리랑 중 아직 살아 있는 것만도 서른 개가 넘고 정선 아리랑만 해도 채집된 것만 천여 수에 육박한다고 하니, 이 나라는 가히 아리랑의 땅이요 우리는 아리랑의 민족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리랑은 징징 짜는 슬픔의 노래나 한의 가락만은 아니다. 단장(斷腸)의 설움마저도 한사코 가라앉히고 곰삭여 내어 마지막에는 마알갛게 우러나오게 하는 그런 화사한 민족의 노래이다. 사랑과 그리움과 슬픔과 이별과 놀이가 뒤섞여 있지만 거기 미움과 증오는 없다. 갈등은 있어도 원망과 비탄은 없다. 끌어안고 감쌀 뿐이다. 하물며 이데올로기 따위의 셈법이 있을 리 없다.

 

 

 


 

 

 

 

 

김병종. 한국화가. 대학교수. 서울대 미대 교수.『바보예수』『생명의 노래』 그림 시리즈,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등으로 순수예술을 이어가면서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서울대 미대 학장, 서울대 미술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유가철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중국회회연구』 등의 책을 내었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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