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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영조의 적자(嫡子) 컴플렉스와 가계도

by 언덕에서 2008. 2. 7.

영조의 적자(嫡子) 컴플렉스와 가계도 

  

'이산'이라고 불린 개혁군주 '정조'

 

몇 년 전에 소설가 이인화의 '위대한 제국'에 의해 조명되었다가 다시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산(祘, '헤아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 明視以算之祘, 영어로 표현한다면 count나 calculate)이며 자(字)는 형운(亨運)으로 영조의 손자이며 진종(眞宗)의 계자(系子)이자 장조(莊祖)의 친자이다. 

 1752년(영조28년) 9월 22일 축시(새벽 1시에서 3시)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원손(元孫)이 되었다. 정조가 태어날 당시 조선 왕실은 극심한 남아 부족으로 왕손 단절의 사태를 염려하고 있었다. 오늘날 수백만의 전주 이씨들의 사정을 생각 한다면 약간 의문점이 들기도 할 것이다. 상당히 수적으로 넘쳐나는 이씨(?)들 가운데 아이러니한 일이 되겠지만 북벌론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진취적인 국왕이 될 뻔한(?) 17대 효종(1619~1659)의 유전자를 가지는 후손은 '희소가치를 지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한 사람의 자손 수로는 보기 드문 500년 역사로 수십만의 후손을 자랑한다는 태종의 왕자 효령대군(1396~1486)의 비웃음을 받기라도 하듯, 효종은 아들이라고는 현종(1641~1674)만 낳았고 공주들도 상당히 얻은 것 같지만 선원계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외손조차 손가락에 꼽을 만큼 귀할 정도이다.

 

 

 

정조 초상화

 

 

 '북벌군주' 효종의 후손들


 

 현종의 외아들인 숙종(1661~1720)이 재위했을 당시 중인 출신의 희빈 장씨가 그토록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효종의 자손이 '단절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경종과 성수(盛壽)라는 두 왕자를 낳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하다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가 최고위 후궁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같았다. 자손이 귀하다못해 낳기만하면 당장 신분의 변화를 줄 정도로 남아에 목이 타는 왕실에 영조와 영수(永壽) 그리고 이름도 없이 조졸(早卒)한 세 왕자를 낳아주어 '후궁의 꽃'인 정1품의 빈(嬪)에 승격된 것이다. 숙종은 세 명의 왕비를 맞이하였는데 첫 왕비가 공주 두 명을 낳고 죽은 것 이외엔 뒤에 들어온 두 명의 정실 왕비에겐 자녀가 없다. 후궁에게서만 6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아버지보다 오래 산 자녀는 단 두 사람이다. 경종(1688~1724)과 영조(1694~1776)로 이들 모두 조선 국왕이 되었다.

 숙종이 그다지 탐탁하지 않게 여기던 후계자 경종이 두 번의 결혼을 통해서도 자손이 없자, 결국 주변에선 양자을 들여 후사를 잇게 하려는 시도가 생기는데 이 문제는 노론과 소론이 정치적 극한 대립 속에서 고육책으로 생각해 낸 계략이었다.

 바로 노론의 후원을 받는 영조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당시 권력을 쥔 소론의 숨은 계책이었다. 이 비밀스러운 계략의 대강을 살펴보자면, 효종의 자손으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조보다는 효종보다 대통(大統)이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던 소현세자의 후손 중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종친 데려와 '경종의 후사'로 세우자는 논리였다.

 이 비밀스러운 계책에 구체적으로 거론된 인물은 소현세자의 현손(玄孫)이었던 건석(健錫)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결국 경종이 친척의 자식보다는 이복아우를 선택함으로서 건석은 훗날 영조의 즉위 후 유배되는 비운을 겪게된다. 정치적 논리에 앞서 경종은 최종 후계자로 효종의 유일한 후손으로 남겨진 이복동생을 선택함으로서 영조의 치세가 시작되게 되었다.

 

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무수리의 아들 '영조'

 

 영조가 형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으로 즉위할 당시 효종의 성년 남자 자손은 영조 뿐이었다. 영조는 평생 정실 부인을 두 명 두었는데 그의 조강지처는 1704년(숙종 30년) 10세 때 맞이한 대구 서씨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였다. 유순하고 천성이 후덕했던 이 왕비는 불행히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결국 영조는 후사를 얻기 위해 왕이 되기 이전부터 여러 측실을 얻었고, 그 결과 훗날 정빈에 책봉된 이씨에게서 1719년(숙종45년) 아들을 얻게 되는데 당시 숙종에겐 유일한 손자였고 또한 영조의 희망이기도 하였다. 당시 후손이 있는 왕자는 왕위계승에 상당히 유리한 인센티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영조의 희망은 훗날 진종(眞宗, 1719~1728)에 추존되었는데 바로 정조의 양부이기도 하다. 이름은 행(緈, '실 사'변에 '다행 행'자를 쓴다)으로 영조가 즉위하자 왕자로서 경의군에 책봉되고 이어 1725년 세자가 되어 양주 조씨 조문명의 딸(훗날 효순왕후)과 혼인하였으나 만9세로 사망함으로서 효장세자라 시호되었다. 효장세자의 죽음으로 후계자를 잃은 영조의 비통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1735년(영조11년)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가 다시 왕자를 낳는데 이가 바로 장조(1735~1762)였다. 장조는 나중에 추존된 묘호이고 처음 시호는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의 이름은 선('마음 심'변에 '펼 선'을 쓴다)이며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로 영조의 차남에 해당된다.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영조의 기쁨은 극에 달했다.

 왕자의 탄생에 흥분한 영조는 주변의 신하들에게 '세 종통(효종, 현종, 숙종을 말함)의 혈맥이 끊어질 뻔하더니, 이제는 죽어 역대 조상들을 만날 면목이 서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친히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영조 초상화)

 

   

 

2남 12녀의 아버지 영조와 '사도세자'

 

 태어난 그 다음 해 바로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후궁의 자식이 곤전의 계자로 입양되어 세자로 책봉되는 사례는 숙종이 경종을 인현왕후의 아들로 들여 임명하는 예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막 태어난 사도세자도 또한 당시 왕비인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양되어 바로 원자로서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워낙 자손이 귀하다보니 후궁의 자식이더라도 바로 세자로 봉해지는 파격적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영조도 이 사도세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아들은 얻지 못했다. 

 조선 국왕 중 가장 오랜 수를 누렸다는 영조는 여러 후궁을 두어 자녀 수가 2남12녀에 이르나 성년으로 자란 자녀는 극히 적었다. 영조의 후궁으로 제일 먼저 자녀를 낳아준 사람은 진종의 생모인 온희정빈(溫僖靖嬪) 이씨로 진종과 옹주 2인을 낳고 일찍 죽었다. 이어서 영조의 후궁으로는 조강지처격으로 대접받은 인물이 바로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영빈(昭裕映嬪) 이씨로 1남6녀를 낳았다. 나머지 4명의 옹주는 귀인(貴人, 종1품) 조씨와 폐숙의(廢淑儀, 종2품) 문씨가 낳았는데 조씨가 낳은 옹주들은 모두 일찍 죽었고 문씨가 낳은 두 옹주는 결혼해서 자손을 두었다. 여담이지만 영조의 12명이나 되는 옹주들 중에서 자식을 낳은 옹주는 단 3명 뿐이었다. 

 영조는 후궁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얼마 안되는 사례의 전형이었다. 경종은 적어도 3년 이상 중전의 자리에 오른 어머니를 두고 있었지만 영조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어머니가 무척이나 천한 신분으로 알려진 여성인지라 수 많은 상층부의 사대부들이 은근히 영조의 출생에 대해 비웃고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영조의 어머니는 궁중에 정식으로 나인으로 뽑혀 온 여인도 아닌 나인들을 돕기 위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점과 평범한 집안출신인 것은 정설인 듯하다.

 

 영조의 생모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의 본관은 해주이며 오위 사과(五衛 司果)를 지낸 최효원과 남양 홍씨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이 정6품의 직위를 얻은 것은 아마도 최씨가 영조를 낳았기 때문에 예우의 차원에서 받은 관직 같으며 최효원의 선대들은 벼슬한 적이 없는 평범한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훗날 영조가 자신의 어머니를 우대하면서 조부에게는 영의정을, 증조부에게는 우의정을, 고조부에게는 우찬성을, 외조부에게 좌찬성을 증직해 줌으로서 자신의 신분적 컴플렉스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숙빈 최씨의 선대 중에서 관직을 얻은 사람은 친조모였던 평강 장씨의 부친인 장원이란 인물로 '집안의 음직'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통덕랑(通德郞, 정5품)을 지낸 것이 전부였다. 모두가 평범한 백성으로 살아간 조상들을 가진 영조로서는 쟁쟁한 사대부들의 천국인 조선 사회에서 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영조가 국왕으로서 사대부들을 누를 수 있는 권리는 아마도 '효종의 유일한 남자 자손'이라는 메리트일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권의 실추'를 꼽으라면 세조(1417~1468)가 단종(1441~1457)에게 왕위를 찬탈한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장자 상속'이라는 성리학의 중요한 논리가 여실히 붕괴되는 장면을 사대부들은 두 눈으로 목격하였고, 두 번째로는 성종(1457~1494)이 친형인 월산대군(1454~1489)을 제치고 즉위하면서 두 번째 폭탄을 맞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적어도 '적자에 의한 왕권의 세습과정'을 무난히 보여주었으나, 마지막 실추의 직격탄을 쏜 것은 바로 선조(1552~1608)의 즉위였다. 명종(1534~1567)의 죽음과 함께 조선 왕실은 사대부의 종가 세습보다 못한 행태의 가계 계승이 이루어짐으로서 복잡한 정치적 사건들을 야기시켰다.

 

왕실을 업신여기는 사대부

 

 방계 중의 한 자손이 들어와 왕실의 대를 잇자 사대부들이 왕실을 보는 눈은 무척 싸늘해졌다. 그 결과, 훗날 선조가 묻히고자 왕릉터를 구할 때 모든 사대부들은 여러 이유를 들면서 더 이상 왕릉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선조의 왕릉인 목릉부터 옛 선조들의 왕릉 터에 비집고 들어가 더부살이하는 '왕릉의 군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왕실이 왕릉의 설치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은 그만큼 사대부들이 왕실을 업신여기기 시작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명종 이전의 군주들의 왕릉지는 현직 영의정의 조부 묘라 할지라도 왕릉이 들어설 자리 근방에 있다면 당장 파서 이장해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거기다가 다시 선조의 후궁 출신의 차남이였던 광해군(1575~1641)이 이어받자 이제는 누구든지 강력한 정치적인 지지만 받으면 군주가 될 수 있다는 묘한 논리가 생겨, 결국 쿠데타로 인조(1595~1649)가 즉위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인조는 광해군보다 정통성 차원에선 더 형편없는 상황이었으나 서인들의 열렬한 지지 덕분에 종계의 순서도 무시하고 즉위했던 것이었다. 결국 그 '왕실 정통성 부족문제'를 인조는 후궁출신 왕자였던 부친 정원군에게 원종(元宗)이라는 놀라운 묘호를 올리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간신히 메꾸어 나갔다.

 인조가 서인들의 반정에 의한 무력으로 대통을 계승한 이후, 인조의 자손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되지만 다시 인조가 장남인 소현세자(1612~1645)의 자손들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차남인 효종을 사자(嗣子)로 정함으로서 성리학에서 보는 정당성의 확보 싸움이 훗날 상복을 입는 문제에서 발생하여 정치판에선 격렬한 예송논쟁까지 펼쳐지게 된다.

 예송의 논쟁 뒷면에는 왕실이 사대부들에게 '자신의 가계'에 대한 정당성의 입증을 확인받는 차원 문제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현종과 숙종은 효종이 숙제로 남긴 '왕권의 정당성 확보'에 예송논쟁의 결과물들로 내놓았다.

 이런 위태로운 정치 상황의 연속 속에서 효종의 후손 군주들은 강력한 사대부 가문들과의 신경전적인 물밑 전투를 벌려가면서 왕권 확립에 심휼을 기울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남자 자손의 수가 극소수에 이름에 따라 왕손의 탄생에 목마른 갈증에 시달리는 이중고를 겪었다.

 

명문가문과의 혼인을 통한 컴플렉스 타개

 

 영조는 자신의 자녀들은 쟁쟁한 가문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고 하나같이 노론의 명문가문과 연결을 맺는데 특히 사도세자의 혼인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국혼이었다. 먼저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영빈 이씨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보다는 훨씬 나은 가문에서 태어난 후궁이었다. 영빈의 부친인 이유번은 첨지중추부사(정3품)를 지내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조부는 별제(別提, 정6품)를 지낸 무반신이었다. 영빈의 외가는 예천 김씨 외조부가 오위 부호군(五衛 副護軍, 종4품)을 지내어 그나마 반가의 체면을 지녔던 가문이었다고 한다.

 외아들의 외가마져 그다지 이름 높은 집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조는 며느리는 훌륭한 가문에서 골라야겠다는 의무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결국 사도세자가 10살 되던 해, 풍산 홍씨 가문에서 세자빈을 들이게 된다. 당시 생원이었던 홍봉한( 1713~1778)의 딸을 간택하게 되는데 이 집안은 상당히 혈통적으로 무게감을 지니는 노론의 명문이었다.

 14대 선조가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얻은 적자녀는 모두 2인이었는데 바로 정명공주(1603~1685)와 영창대군(1606~1614)으로 계비인 인목왕후가 낳은 자녀들이다.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을 죽인 후, 선조의 정실부인 자손은 오로지 정명공주의 후손들이었다. 정명공주는 남동생의 죽음 이후 간신히 하가하게 되는데 흥미롭게도 풍산 홍씨 집안으로 갔다.

 풍산 홍씨는 원래 당파적으론 남인에 속한 가문이었으나 부마가 되어 영안위에 봉해진 홍주원(1606~1672)의 집안만은 유일하게 서인에 분류되는 '흥미로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홍주원의 외조가 그 유명한 연안이씨 집안의 이정구(1564~1635)인지라 홍주원 집안은 풍산홍씨 중에서 서인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 이정구는 서인계열 핵심가문 중의 하나인 연안 이씨였는데, 특히 이정구의 고조부였던 이석형(1415~1477)의 후손들은 대부분 골수 '노론 가문'으로 분류되었다.

 성종때 좌리공신이었던 이석형의 자녀는 2남1녀였는데 그중 외동사위가 은진송씨 집안의 송여해였으며 송여해의 6세손에서 '노론의 영수'가 된 송시열(1607~1689)이 나왔다.

 연안이씨 이석형의 자손들은 사림이 파당으로 나뉠 때 대부분 서인으로 분류되었고, 훗날 다시 분당 때엔 노론의 핵심가문으로 떠올랐다. 홍주원은 이런 위세 높은 외가 덕분에 '선조의 부마(영안위)'가 되었고 엄청난 복록을 누리다 죽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선조 정실 공주의 부마였던 '영안위 홍주원'의 현손이 바로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이다.

 

적(敵)이었던 사도세자의 처가

 

 사도세자의 세자빈이 된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뒤에 敬懿王后)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 핵심가문 출신으로서 쟁쟁한 친족들을 두고 있었다.

혜경궁 홍씨는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담한 죽음을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인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살아 생전, 사도세자는 세자빈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홍씨를 세자빈을 둔 후 그는 바로 다른 여인들에게 관심을 돌렸고 곧 후궁들이 생겨 자녀들을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혜경궁은 2남2녀를 낳았는데 첫째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은 요절했고 둘째가 바로 정조(正祖, 1752~1800)였다. 뒤를 이어 두 명의 군주(郡主)를 낳았는데 모두 성인이 되었고 명문 집안에 하가하여 자손을 낳았다.

 사도세자는 두 명의 세손을 낳아 자신의 임무를 다하였다. 거기다가 또 다른 자식들(서자 왕손 3인과 현주 1인)도 얻어서 영조는 후계의 근심을 어느정도 덜 수가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노론 핵심의 며느리에게서 정당한 후계자였던 정조를 얻음으로서 골치아픈 아들의 비행(非行)에 대해 단죄를 내릴 수 있는 여유도 생긴 것이었다.

 1762년 그 해 여름은 격렬하였다. 집권세력인 노론은 사도세자의 정치적 방향에 엄청난 회의감을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영조가 여러번에 걸쳐 세자에 대한 양위(讓位)의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본의에 의한 말은 아니었고, 적어도 비대해진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에 대해 도전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각심 차원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이런 양위소동은 오히려 아들 사도세자의 정치적 목숨줄을 죄어놓는 결과로 나타났다. 세자는 왕권을 도전하는 노론보다는 소수파로 몰락해버린 소론에 대해 깊은 애정을 왕권의 대리(代理)기간에 표시하기 시작했기 따문이었다. 세자의 정치적 소신에 대해 노론은 극도의 도전감을 느꼈고 노론의 세자를 향한 인식에 대해서 영조는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다 어느 한 쪽이 패배한다면 그 휴유증은 조선의 사회를 뒤엎고도 남음이 있는 엄청난 파장이 될 것이라는 걸 영조도 모를리가 없었다. 더구나 숙종 때처럼 '국왕의 정통성'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신권이 당파로 인해 쪼개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노론 이외 정치마당을 대체할 세력은 이미 경종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이 시기 노론의 신권이 왕권과 부딪힌다면 양 편의 공멸은 뻔한 이치였다.

 

아들을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서 자신의 왕권을 보존한 아버지

 

 특히 몰락한 소론에 동정을 가지는 세자를 두고서 노론도 서서히 분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론 중에서 세자의 편에 서는 자는 아주 극소수였다. 세자의 정치논리는 노론의 중심부와는 전혀 맞지 않았고 갈등의 끝은 영조의 결단에 달렸었다. 영조는 결국 자신의 아들인 세자를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서 자신의 왕권을 보존하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결단의 끝은 부자간의 비극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아들인 세자는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도 아사(餓死) 당하게 되었다. 아들의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영조는 엄청난 후회를 한들 현실은 이미 비극으로 종결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현실 정치 논리에 원망을 가했고, 그 감정을 사도(思悼, '잘못이 있어 일찍 죽은 것을 애도한다'라는 뜻이다)라는 시호에 넣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영조는 다시 고달픈 신경전을 펼쳐야했다. 피를 먹어 본 권력은 다시 아들 뿐만 아니라 손자의 피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도세자가 유일하게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은 '세손 이산' 뿐이었다. 그러나 노론의 핵심부 눈에는 '세손 이산'이라는 인물은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였다. 언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복의 칼날을 집권세력인 노론에게 겨눌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조는 노론으로부터 어린 세손를 살리기 위해 족보를 바꾸기로 한다. 바로 어린 나이로 죽은 백부 효장세자(孝章世子)에게 정조를 출계(出系)시켜 사도세자와의 인연을 끊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정조 행차도 속의 '혜경궁 홍씨의 가마')

 

 할아버지의 결단으로 '세손 이산'은 아버지를 바꾸게 되었는데 조선시대 양자(養子)의 개념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죽을 때까지 양부가 아버지가 되고 족보에도 그렇게 기록되는 것이다. 세손 생부였던 사도세자를 '숙부'라 불러야했고 백부인 효장세자를 '아버지'로 부름으로서 노론의 예봉을 피해나갔다.

 그러자 다시 권력다툼은 어이없게도 세손의 이복동생들까지 끼어들이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영조가 죽었을 때 후손은 세손과 그 3명의 이복동생들 뿐이었다. 즉 총 네 명의 왕손들만이 왕위후보자였는데, 그들은 정조와 은언군(恩彦君)과 은신군(恩信君) 그리고 은전군(恩全君)이라 불린 3명의 서출(庶出) 왕손들이었다.

 서2남이던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이었던 연령군(延齡君)의 후사로 나가서 사도세자의 족보에서 빠졌고 유력 후보는 역시 은언군과 은전군이었는데, 특히 은전군이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 당하는 대상인물이었다. 은전군의 어머니가 사도세자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른 형제와는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정조 시대 이후의 조선 왕실

 

 사도세자의 후궁 아들들은 제 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갔다. 정치적인 변동에 항상 약자로서 당하는 운명을 맞이하는데 워낙 왕손이 없다보니 툭하고 터지는 역모사건에 그들의 이름이 안 올려지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왕손의 숫자가 뻔하다보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직계후손을 남긴 왕손은 오직 은언군 뿐이었다. 그 은언군의 자식들도 부친처럼 계속 정치적인 이용만 당하다가 종국엔 비명에 목숨을 잃어갔고 겨우 손자대인 철종(哲宗, 1831~1863)만이 억세게 운좋게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보상을 받게 되지만, 철종이 후사없이 죽음으로서 그를 마지막으로 효종의 직계 후사는 단절되고 만다.

 그토록 간신히 이어져 내려오던 효종의 남계 자손은 철종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되고 마지막 조선의 명맥을 이어준 고종과 순종은 유전적으로는 인조의 3남이었던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후손들이다.

 고종의 조부였던 남연군(南延君, 1788~1836)은 인평대군의 7세손으로 은신군의 양자(養子)로 입적되면서 근친 왕손으로 인정받은 사례이다. 참고적으로 고종의 계통은 족보상 영조의 계통이기보다는 숙종의 6남인 연령군(延齡君)의 후손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정조의 동생인 은신군이 소목(昭穆)의 차례를 벗어나 조부뻘인 연령군의 계자(系子)가 되었고 이어 남연군이 은신군의 계자로 집안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철종은 순조의 계자로 입적되어 대통을 이어나갔는데 순조는 철종의 당숙(堂叔, 5촌 아저씨)이다.

 영조와 정조의 시대 왕실은 상당히 어려운 난국에 봉착한 상태였다. 점점 왕실의 권위가 혈통적인 면에서부터 잃어가면서 그에 따라 권력의 힘은 약화되었다. 숙종의 사후 정실(正室)의 자식으로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정조와 헌종(憲宗, 1827~1849) 뿐이었다. 정조조차도 왕비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결국 여러 후궁을 들여 간신히 후사 순조(純祖, 1790~1834)을 얻었고, 순조 또한 아들이라고는 문조(文祖, 1809~1830) 뿐이었으며 문조 또한 자식이라곤 헌종 밖에 두지 못했다.

 왕자의 수 만큼이나 왕권의 힘은 점차 줄어갔고 결국 '방계 중의 방계'였던 철종과 고종이 연이어 들어옴으로서 왕조의 권위와 왕권은 땅에 떨어졌으며 서서히 황혼(黃昏)이 지는 왕조로서 그 이름만 남아 1910년까지 그 명맥을 다해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