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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기독교만 타종교에 배타적인가?

by 언덕에서 2008. 6. 16.

 

기독교만 타 종교에 배타적인가?

 

 

 

-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이라서 타 종교에 대해 관대하지가 못한 것이 아니냐는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기독교가 과연 타 종교에 비해 배타적인가, 아니면 타 종교도 배타적인데 왜 기독교에만 배타적이고 자기 종교 우선의 독선성에의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질문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기독교라고 함은 천주교, 개신교를 총칭하는 표현임) 필자가 보기에는 이슬람교도 기독교만큼 배타적이고 호전적이며 독선적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통종교 부류에 있는 불교와 증산교 계통의 종교집단들도 그에 못지않다. 기독교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다른 종교나 그 종교행위를 부정하거나 공격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 교인 개개인의 생각과 행위에는 타 종교를 배척하고 부인하며 오직 기독교에만 최고선의 가치를 두려고 하는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 종교, 그 본질상의 배타성

 

어느 종교이던 인간의 사회와 집단 속에서는 본질적으로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안고 있다. 유일신 체계 탓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한 칼 마르크스나 종교는 저급한 최면의 상태라고 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연상하지만, 틸리히(paul tillich, 1866~1965)는 종교가 삶의 허무와 위협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을 제공하며 잡다하고 산만한 의식체계에 대하여 그것을 통합하는 구심점을 제공한다 하여 '살아야만 하는 어떤 의미체계'(the meaning system of life)를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틸리히의 이러한 지적은 궁극적으로 편협한 기독교류의 질곡 속에 배타성을 키울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안고 있음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할 수 있다.

 

- 유목민족 종교의 배타성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사막과 초원, 그곳에서 양 떼와 소떼를 몰면서 공격적인 침입자와 타 유목민들과 공존해야만 했던 유목민족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가까운 중국역사를 보더라도 황하 이북의 흉노, 동이계열의 북방유목 민족은 농경문화를 이룬 한족에 공격적이었다. 이는 민족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유목민족이었던 이스라엘사람들이 농경민족이었던 가나안사람들이나 블레셋사람들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유대교를 유지하고 그들의 통일왕조를 성립시킨 점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점은 같은 유목민족 종교로서의 이슬람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가나안문화가 그들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정치사가 흘렀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서구문명이라는 문화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만 한다. 이 기독교라는 문화제국주의는 럿셀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로마제국주의의 환영의 잔재일 뿐인 것이다. 그것이 문명의 충돌로 보이는 것이고 배타성의 원류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역사의 비극성이 여기에 있다.

 

- 이슬람교의 배타성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였으나 오로지 유대 민족들만의 종교라는 유대교의 편협성을 거부하여 유대교와 등을 돌렸다. 또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교리의 모순, 즉 '인간=신'이라는 교리를 거부하여 기독교와도 등을 돌렸다. 그러나 오늘날 '문명의 충돌'이라고까지 일컫는 이슬람교와 유대교, 기독교의 갈등과 충돌은 한뿌리임에도 크게 다른 교리에서 오는 차이와 반목도 있지만 오랜 역사를 두고 반복된 전쟁과 민족 간의 증오에 더 큰 원인이 있다. 즉,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교리 자체가 배타적이라기보다는 문명 간의 충돌의 산물로써 자연스레 배타적으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 기독교 세력 간의 배타성

 

 필자가 초. 중 고등학교 시절 다녔던 부산 서면성당(가톨릭교회) 근처에는 부전교회라는 부산시내 굴지 규모의 개신교회가 있었다. 주일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그 교회 학생들을 보며 필자와 동료들이 품었던 이유 없는 적개심의 실체는 무엇이었는지 부끄럽지만 지금도 궁금하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지적한 바대로 조직이 거대화되면 관료제화되고 이기주의화되는 특성이 은연중에 당시의 어린 우리들을 파고든 것은 아닐까?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는 종교였지만 역사 속에서의 가톨릭 교회는 결코 너그럽고 자비롭지 않았다. 종교의 가장 잔혹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종교개혁 이후 유럽대륙은 백여 년동안 가톨릭 세력, 종교개혁 세력, 청교도 세력이 뒤얽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신교도 세력 간의 전쟁에서도 잔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역시 투쟁하는 인간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그다지 이상한 모습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부분이다.

 

- 정치권력과 융합된 종교의 배타성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 포르투갈의 중남미문명 파괴의 전위에는 항상 기독교가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선교사들은 '야훼 하느님'을 외치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들을 철저히 파괴하며 식민지를 정복해 나갔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정치권력화된 종교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다만, 중세사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해 온 기독교의 경우 그러한 배타성의 범위가 상대적으로 좀 더 많아 보일 뿐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황룡사나 불국사는 교회-절이 아니라, 그것은 제정일체시대에 철저하게 대중의 신앙생활과 유리된, 그리고 국가권력의 철통 같은 비호 속에서 이루어진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특수권력조직이며, 오늘날의 제도로 말하자면, 그것이 청와대이며 중앙청이었다.

 

-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

 

 최근의 기사를 보도록 하자. 아래의 기사는 한국 기독교가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배척을 받는 원인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11가지 이유"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1.02 16:09

 

 안희환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는 '목회와 신학' 신년호에서 "안티 기독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날이 갈수록 그 수위가 높아지고 비판의 내용도 정교해지고 있다"면서 "그에 반해 기독교계는 안티기독교운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대책도 전혀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은 안티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며 '기독교를 비판하는 11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소개했다.

 안 목사는 안티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첫 번째 이유로 '기독교인에게 상처받은 일'을 들면서 어느 네티즌이 어린 시절 교회에 갔다가 헌금액수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은 경험 때문에 안티기독교 정서를 갖게 된 배경을 소개했다. 안티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좋은 소재로 이른바 '에어컨 장'이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몇 년 전 교인과 불륜 관계가 들통나자 에어컨 실외기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한 목사의 이야기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부도덕성이 안티기독교 운동의 주요 배경이 된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중대형 교회의 세습 △비과세 △군부독재시절 조찬기도회 등 권력과의 밀착 △친일 활동 △단군을 섬기지 않는 등의 반민족주의적 성향 △집회에서 "사찰이 무너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등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는 교리에 대한 거부감 △구약성서에 나오는 잔인한 명령 등도 기독교를 공격하는 주요 소재라고 안 목사는 밝혔다.   안 목사는 안티기독교운동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회 자정운동 △교회세습 등 잘못된 부분은 고치되 기부금 성격을 가진 세금문제에 관한 교회 입장은 적극적으로 홍보 △역사상 과실에 대한 참회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행위 중단 △인터넷을 통한 적극적 사역활동 등을 제시했다.

 

 

- 정도의 차이지만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마지막으로 타 종교에 대해 관대한 것처럼 보이는 불교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불교는 불타를 섬기는 종교이다. 불타는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로는 붓다(budda)이다. 붓다는 '깬 사람', '각성하는 사람', '스승'이라는 뜻으로, 한자말로 부처라고도 한다. 불교는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라는 사회 불평등과 모순, 그리고 운명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체념적인 힌두교에 반발하여 그 교리를 부정하고 인간 자신과 인류를 구출하기 위한 인도종교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 이슬람교가 절대신(유일신)에 의지하며 구원을 바라지만 불교는 스스로의 노력과 수행에 의해 극락에 이르는 '정신의 종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신교든 천주교와 기독교가 발 빠르게 권력과 유착해서 영향력을 확대해갈 때 불교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상대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소수자(minority)였던 기독교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다면 불교는 오랜 역사 동안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새삼 그에 대한 관심을 경주하기보다는 방대한 재산의 독점적 확보를 위해 종단 내 배타적 세력이 국가권력과 은밀한 거래방식을 즐기지는 알았을까? 그간 진행되었던 불교종단 내의 고질적인 분규는 그런 사정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승만 정권 이후에도 불교 내부에서는 물적. 인적 자원을 둘러싼 분규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한 사정은 불교 자체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며 불교의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행동을 제약하고 사회적 발언을 위축시켰다. 거꾸로 보면 불교의 그러한 모습이 다소 포용력 있고 중후한 태도를 사회에 견지하는 것으로 보여왔다.

  지구상의 종교들의 배타적 발현형태는 외관상 언제나 동일한 모습을 견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의 배타성이 대체로 노골적이며 타 종교에 대해 거침없이 적대적인 경향이 있다. 그리고 천주교의 배타성은 상당히 권위적이다. 또 불교의 배타성은 은폐되어 있다. 역설적이지만 은폐되어 있는 만큼 그 배타성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종단 내부 파벌과 문중 간의 배타적 권력확보 시도로 분규가 잦으며 불교자체의 긍정적인 사회영향력이 줄어든 원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 배타성의 발현형태는 다르지만 국가권력 등과의 유착을 통한 종교들의 배타성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실상 모든 종교들이 타 종교에 배타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몇몇의 종교를 제외하고는 쉽게 인식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배타성의 발현형태가 고상한 종교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당과 지옥, 구원과 심판을 강조하여 대중들의 불안심리와 보상심리를 동시에 자극하는 적극성을 개신교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다른 종교의 경우 그와 같은 원색적인 모양보다는 세련되고 고고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