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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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金洙暎, 1921∼1968)의 시집. 1974년 [민음사] 간행. 세상 사람들은 시인 김수영을 여러 갈래 시선으로 각자 다르게 평가한다. 어떤 사람들은 ‘난해한 모더니즘의 시를 쓴 사람’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철저한 소시민적 자학(自虐)과 청교도적 자기비판, 그리고 도덕적 순결성을 갖춘 엄격한 시인’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 자유와 우상 파괴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과격한 시인’이라 칭하기도 하며, 더러는 ‘반전통주의자이며 반시론자(反詩論者)인 동시에 적극적인 참여파 사인’으로 단정하기도 한다. 또 ‘스스로 깊이 있는 시 이론을 새운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
길지 않은 삶을 살았던 한 시인이 이렇게도 다양한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단 한가지, 그것은 언제나 과거에 만족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면서 오늘의 정체를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그가 펼쳤던 숱한 노력과 뜻이 여러 형태로 분산되어 투영된 결과, 이런 다양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시인 김수영의 모습은 동료 시인이 한 다음과 같은 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렸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혀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김현승 : <김수영의 시사적 위치와 업적>에서)
▶양심의 시인, 정직의 시인, 자유의 시인
김수영 문학의 첫째 특성은 정직성에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생활을 숨기지 않는다. 김수영을 ‘광복 이후의 최대의 시인’으로 보는 사람이든, ‘흐트러진 작품을 쓴 시인’으로 보는 사람이든, ‘그의 삶을 사표로 모시는’ 사람이든, ‘경박한 모더니스트’나 ‘시시한 술꾼’으로 보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듯이 그는 정직하다. 문학에서 정직한 태도란 자칫하면 애처로운 고백체에 떨어지기 십상이지만, 그의 정직성은 매우 당당한 목소리로 표출된다.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 <폭포>(1959)-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취할 순간조차’ 주지 않으며 ‘쉴 사이 없이’ 떨어지는 폭포의 ‘곧은 소리’는 바로 김수영 자신의 정직성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비굴하거나 초라하지 않다.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져 내릴 만큼 당당하고 고매하다. 우리는 이 시에서 당당한 정직성이 김수영 시세계의 으뜸가는 특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의 두 번째 특성은 현실을 인식하는 날카롭고 치열한 시각에 있다.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던 그는 매우 폭넓은 독서를 통해 서구의 시와 그 이론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우리 현대 시사(詩史)에서 가장 뛰어난 식견과 이론을 구비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양의 문학 이론에 대한 열등감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의 광범위한 독서 영역은 그에게 나름대로 현실을 보는 눈을 제공해 주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의 개념은 형식주의적인 관점과 역사주의적인 관점을 함께 용인하는 관점이었다. 역사로서 보면 역사가 시의 전부이고, 형식으로서 보면 형식이 시의 전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것은 현실이었다. 시의 역사주의와 형식주의를 다같이 용인하면서 그것들보다 더 깊고 더 가까운 데 있는 현실로 눈을 돌린 김수영은 우리 시대의 근본 문제를 향해 곧장 나아간다. 신과 신이 싸우고 있는 분단 시대에 자본주의자도 공산주의지도 될 수 없는 김수영은 제3의 원리를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는 원리 없이 빈곤과 싸우고 억압에 대항한다. 그의 말대로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 자신의 한걸음에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간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푸른 하늘을」(1960) -
전진하는 행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제약에 부딪치고 만다. 이럴 때 그는 사회의 허위와 모순과 압박을 극명하게 인식하며 자유를 절규하게 된다. 자신의 삶은 자유를 향한 싸움이라고 그는 믿는다. 안주와 정체에 만족하며 자유를 위해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려는 그의 삶은 자유를 향한 영원한 여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자유를 얻기 위해 현실과 치열하게 맞서는 이런 태도로 인해 어떤 이들은 그를 참여파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시인이었던 그는 생활 현실에서도 적잖은 구속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삶, 생활, 육체, 현실, 돈, 여자, 가족 따위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대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는 생활 현실을 수긍하고 그 범속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전진하는 자의 삶이 세속적 제약으로 인해 고통스러워질 때에도 그는 자기 혁파(革罷)를 멈추지 않는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달나라의 장난>(1959)-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74) -
현실에 매몰되어 진진과 자기 혁파가 어렵게 될 때,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고백한다. 자꾸만 소시민이 되기를 강요하는 현실에 빨려들어 옹졸해지는 자신을 직시하고 반성을 거듭한다. 성실하고 정직한 인간은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감추지 않고 그쳐 나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스스로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자기 혁파의 노력을 김수영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는 자가 지닌 강인한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현대문학](1968.8) -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 아름다운 시 <풀>은 오늘날 우리 시단의 많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풀>은 그의 사후 많은 시인들에게 상상력의 고향과 같은 것이 되어 한국 시단을 밟으면 밟을수록 푸르러지는 풍요로운 풀밭이 되게끔 했고, 또 그 위에 더욱 다양한 ‘풀’들이 솟아나 풍성한 숲을 이루게 했다.
▶정직한 시인의 시적 성취는 한국 시의 뛰어난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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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시인, 정직의 시인, 자유의 시인이라고 불러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가 마흔일곱이라는 이른 나이에 돌연히 타계한 것은 우리 시단을 위해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김수영에 대한 평가는 나날이 찬사의 깊이를 더해 통속한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던 한 정직한 시인의 시적 성취는 이제 한국 시의 뛰어난 모범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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