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시집 『와사등』
김광균(金光均.1914∼1993) 의 첫 시집으로 1939년 남만서점에서 처음 간행하였고, 1946년 정음사에서 재판이 나왔다. 1930년대 후반 한국의 시들은 이미지를 가장 중시하는 모더니즘 경향을 보였는데 《와사등》은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대표적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외인촌(外人村)》 《와사등》 《설야(雪夜)》 등의 창작시와 흄, 에즈라 파운드, 엘리엇 등 영국의 주지주의 시를 번역한 《해바라기의 감상》 《창백한 산보》 《동화》 《황혼에 서서》 《오후의 구도》 《북청 가까운 풍경》 《창》 《석고의 기억》 《벽화》 《호반의 인상》 《산상정》 《밤비》 《가로수》 《소년 사모》 《성호 부근》 《공지》 《풍경》 《정원》 《등》 《광장》 《신촌 서》 《SEA BREEZE》 등 27편이 실려 있다. 정음사판에는 《설야》가 빠져 26편만이 실렸다.
《외인촌》 《와사등》 《설야》는 주지주의적 서정시의 흐름을 형성한 작품으로 김광균의 초기 모더니즘적 특징을 뚜렷이 보여준다. 《외인촌》은 현란한 색채어와 공감각 이미지로 채색되어 시인의 고독한 시선을 느끼게 해주며, 《와사등》은 현대 물질문명의 현란한 무질서에 대한 고민을 그린 것으로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한국 지성인의 정치적 방황을 느끼게 한다. 《설야》는 비유나 이미지보다 서정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그 서정성은 현대성과 조화를 이루어 주지적 서정시의 흐름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와사등(瓦斯燈)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노 어데로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 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의 벙어리 되여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래.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느린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 [조선일보](1938년 6월 3일)-
김광균은 193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회화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시(도시적 삶의 고독과 삶의 비애감을 주관적인 감각 체험으로 묘사)로서 현대 문명 속에서의 삶이 지닌 군중 속에서의 고독과 비애, 그리고 뿌리 뽑힌 이방인적인 우수를 노래했다.
위의 시는 참신한 비유를 통한 독창적인 이미지를 창출해 보인 작품이다. 시각적 심상을 주축으로 한 이 시는, 그것을 촉각적 심상으로까지 전이시키면서 공감각적 심상을 보이고 있다. ‘와사등’이란 제목은 '가스등'이라는 이국적(異國的) 정서를 환기시켜 주는 도시적 가공물로 일몰(日沒)과 밤으로 귀결되어 절망을 상징하며, 나아가서는 일제 치하라는 당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공허와 비애로 살아가는 당시대 사람들의 삶을 표상하고 있다.
외인촌(外人村)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뭍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조선중앙일보](1935) -
김광균은 김기림, 정지용과 더불어 30년대 모더니즘 시를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직접적으로는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의 음악성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김기림의 말처럼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회화적인 시를 즐겨 쓴 이미지즘(imagism) 계열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도시적 소재를 바탕으로 공감각적 이미지나 강한 색채감,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 등의 기법을 시에 차용했으며, 특히 사물의 한계를 넘어 관념이나 심리의 추상적 차원까지도 시각화하였다. 그의 시에는 기계 문명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감과 삶의 우수와 같은 소시민적 정서가 짙게 깃들여 있다.
성호 부근(星湖附近)
1
양철로 만든 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기일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 머얼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 [조선일보](1937. 6. 4) -
김광균은 회화적 이미지에 도회적 감각과 낭만적 서정성을 가미한 독특한 시풍으로 우리 근대 시사의 한 정점을 구축한 시인이다. 그의 시에 나타난 감각적 이미지의 세계는 한국 이미지즘 시의 한 전범으로서 줄곧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의 시는 어느 것이나 한 폭의 산뜻한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매우 비사실적이고 작위적인, 시인의 주관적 감정에 의해 채색된 풍경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리움, 비애 등의 감상과 연결된 현란한 수식어들이다. 이러한 수식어들이 만드는 시각적 이미지들은 결국 산뜻한 눈요기로서의 풍경만을 연출할 뿐, 내면의 구체적 경험과 연결된 감동의 세계에 연결되지는 못한다. 그는 분명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과 그 속의 도시인의 방향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으나, 시 속에 그려진 현실이란 추상적 공간일 뿐 역사적 현실은 아니다. 그의 시 속에는 특이하게도 봉건적 질서를 파괴한 현대 문명의 여러 사물들과 봉건적 감정의 유물인 슬픔, 한탄 등이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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