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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절대고독과 플라타너스 『김현승 시선』

by 언덕에서 2013. 11. 11.

 

 

 

 

절대고독과 플라타너스 『김현승 시선

 

 

 

 

김현승(金顯承, 1913~1975)은 1913년 4월 4일, 부친 김창국(金昶國)과 모친 양응도(梁應道)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신학 유학지인 평양에서 태어나 6세 때까지 부친의 첫 목회지 제주읍에서 자랐다. 1919년 4월, 부친이 전남 광주로 전근을 가자 따라서 이주, 미션계인 숭일학교(崇一學校) 초등과에 입학해 1926년 3월에 졸업했다. 1927년 4월, 부친의 권유로 친형 현정(顯晶)이 유학하고 있던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 4월,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4월 위장병으로 1년간 광주에서 휴양했다. 1934년 5월, 당시 시인이며 문과 교수였던 양주동의 소개로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 첫시집 <김현승 시초>(1957) -


 1935년, 시 <아침>, <황혼>을 ≪중앙일보≫에 발표했다. 1936년 3월, 숭실전문학교 문과 3학년을 수료한 후 숙환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광주로 귀향해 모교인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듬해 3월, 교회 내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이 신사 참배 문제로 확대되어 사상범으로 광주 경찰서에서 검거, 물고문과 재판 등을 받았다. 1심은 무죄였고, 2심에서는 벌금형을 받았다. 1938년 2월, 교육자, 기독교 장로인 장맹섭(張孟燮)의 딸인 장은순(張恩淳)과 혼인했다. 그해 4월, 신사 참배 문제로 숭실전문학교가 폐교되어 광복 때까지 학업을 중단했다. 한편 교직에서도 해고되고 시작(詩作) 활동도 중단하게 되었다. 평안북도 용강군 사립학교에서 교직을 맡았다. 이후 황해도 흥수원, 전라남도 화순 등을 전전하며 금융조합에 몸을 담기도 했다. 이 기간에 모친상을 당했다.

 

 

 

 

 1945년 8월, 광주 호남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했으나 곧 그만두었고, 1946년 6월에 다시 문을 연 모교 숭일학교에 초대 교감으로 취임했다. 1948년에 교장으로 승진 발령이 났으나 사퇴했고, 1949년 6월에 교직에서 물러나 시작 활동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1951년 4월, 조선대학교 문리과 대학 부교수에 취임하고, 1959년까지 재직했다. 광복 후 초기작으로 <내일>, <동면(冬眠)>, <푸라타나스>, <내가 가난할 때> 등 민족적 낭만주의 경향이 짙은 시를 발표했다.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음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문예](1953. 6)-

 

 1953년 5월에는 광주 지방의 문인을 중심으로 한 계간 동인지 ≪신문학(新文學)≫을 창간하고 주간이 되었다. 1955년 4월, 한국시인협회 제1회 시인상에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같은 해 5월에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에 임명되었고 7월에는 전라남도 제1회 문화상 문학 부문상을 수상했다. 1957년 시집 ≪김현승시초≫를 발간했다. 한국문학가협회 상임위원이 되었다. 1960년 4월 모교의 후신인 숭실대학에 부교수로 취임했다. 이 무렵 전직 조선대학교에서 문리과 대학장 취임 교섭을 받았으나 사절했다. 1961년 12월에 한국문인협회 이사에 당선되었다. 이후 1966년 12월에는 시분과위원장, 1970년 1월에는 부이사장직을 맡게 되었고, 이 기간 중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절대고독≫(1970) 등을 발간했다.



견고한 고독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상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현대문학] 130호(1965.10) -

 

 


 1972년 3월, 숭전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에 임명되었다. 한 달 뒤인 4월, ≪한국 현대시 해설≫을 간행했다. 1973년 3월, 고혈압으로 졸도했다. 병세는 호전되었으나, 이후 그의 시 세계는 급격히 변모했다. 같은 해 5월, 서울특별시문화상 문학 부문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김현승 시 전집≫을 간행했다. 1975년 4월 11일, 숭전대학교 채플 시간에 기도 중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수색동의 자택에서 6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사후인 1975년 11월 15일에는 ≪마지막 지상에서≫가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되었고, 1977년 3월 25일에는 산문집 ≪고독과 시≫가 지식산업사에서 간행되었다.


 


절대 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와 함께.


 -시집 <절대고독>(성문각.1970)-


 김현승 시의 변모 과정은 1930년대에는 민족적 로맨티시즘이나 민족적 센티멘털리즘이 짙게 풍기는 자연에 대한 예찬과 동경의 세계를 주로 노래하다가, 자연미에 기지와 풍자와 유머를 직조한 모더니즘의 경향을 띠기도 했으며, 민족의 암흑기를 벗어난 해방을 맞은 후부터 1960년대초까지는 외면적인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로 관심을 쏟으면서 기독교정신을 기조로 한 시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출처 : 안중근 의사 기념관

 

 1960년대 이후부터 그러한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 선 인간으로서의 고독의 세계를 추구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 이후의 시는 매우 지적인 서정시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건강한 생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기독교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준엄한 비판정신과 그런 바탕 위에 선 시의 표현미는 특기할 만하며, 이외에도 많은 시론(詩論)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