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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유치환의 첫 번째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

by 언덕에서 2013. 11. 4.

 

 

 


유치환의 첫 번째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의 첫 번째 시집. A5판. 126면, 황색지(黃色紙)에 인쇄한 특수본으로, 1939년 [청색지사(靑色紙社)]에서 발행하였으며 장정은 화가 구본웅이 맡았다. 작자의 첫 시집으로 자서(自序)에 이어 모두 55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서울로, 만주로 방황하던 약 10년간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저자가 문단에 데뷔한 1931년부터 약 8년간에 걸쳐 쓴 것들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그의 초기를 대표하는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깃발><그리움><입추><노오란 태양> 등이 그것이다.

 지은이의 서문에 이어 3부로 나누었는데, Ⅰ부는 <박쥐><고양이><그리움><이별><아버님> 등 24편, Ⅱ부는 <죽(竹)><조춘(早春)><시일(市日)><청조(靑鳥)여><그리우면><입추(立秋)>등 21편, Ⅲ부는 <향수(鄕愁)><원수><심야(深夜)><군중(群衆)> 등 10편, 모두 55편을 수록하였다.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조선문단](1936년 1월호) -

 

 저자는 서문에서 “항상 시를 지니고, 시를 앓고 시를 생각함은 얼마나 외로웁고 괴로운 노릇이오며, 또한 얼마나 높은 자랑이오리까”라고 시인의 높은 긍지를 말하면서, “시란 생명의 표현, 혹은 생명 그 자체”라고 말하였는데, 이와 같은 언명은 그의 작품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이른바 ‘생명파’의 시적 경향을 스스로 웅변한 것이라고 본다.

 ‘시인이 되기 전에 한 사람이 되리라’는 것은 자서(自序)의 1절로, 이것은 훗날 ‘참의 시는 마침내 시가 아니어도 좋다’고 말한 바처럼 시인으로서의 그의 신념이며,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계열의 말단 기교주의와 시정신의 부박성에 대한 인생파(人生派) 시인으로서의 선언이다.

 

 

일월(日月)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슬소냐.


머언 미개(未開)ㅅ 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哀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좋은 증오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義)에 즘생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 [문장] 3호(1939.4) -

 

 ‘침범하고, 굴복하고, 변화하는 흉악하고 비겁하고 무상한 것들에 대한 의지의 항거나 또는 명령’(서정주의 서평)인 그 굽힐 줄 모로는 의지, 그것은 이 시인의 전 작품에 일관된 시정신이지만, 첫 시집에서는 ‘의지를 의지하는 고행, 철로(鐵路)의 구도자적 애수’의 표표(飄飄)한 정서가 서글서글한 한자어와 문어체적인 표현에 어울려 특수한 풍격을 이루고 있다.

 

 

 

 

 이 시집에서는 두 가지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인생탐구의 보다 명상적인 경향이고, 둘째는 자연을 소재로 한 순수서정의 경향이다. 이 가운데 전자가 이른바 생명파의 경향에 속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깃발><일월(日月)><분묘(墳墓)>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특히, <일월>에서 우리는 저자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외경, 그리고 의지에 대한 강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원초적인 것, 본능적인 것, 생이 지닌 근원적인 고뇌 등 생명파 시들의 보편적인 주제가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은 1930년대 후반에 생명파를 탄생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 시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 <청마시초(靑馬詩鈔)>(청색지사.1939)


 

 한편, <입추><산><추해(秋海)> 등은 순수한 자연의 서정을 노래한 시들이다. 예를 들어 <입추>에서는 인생론적 요소나 생명파적인 특징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자연의 서정이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연 서정은 제2시집 <생명의 서(書)>에 이르면서 점차 불식되고 생에 대한 보다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시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별


표연히 낡은 손가방 하나 들고

정거장 잡음 속에 나타나 엎쓸린다

누구에게도 잘 있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새삼스레 이별에 즈음하여

섭섭함과 슬픔을 느끼는 따위는

한갖 허례한 감상밖에 아니어늘


허황한 저녁 통곡하고 싶은 외로운 심사엔들

우리의 주고 받는 최대의 인사는

오직 우의로운 미소에 지나지 못하거니


나무에 닿는 바람의 인연-

나는 바람처럼 또한

고독의 애상에 한 도를 가졌노라.

 

 - <청마시초(靑馬詩鈔)>(청색지사.1939)

 

 이러한 의미에서 <청마시초>는 1930년대 후반에 생명파를 탄생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 시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이 시집은 1930년대 초의 ‘시문학파’로 불리는 언어기교주의나 동시대 중반의 모더니즘에 대립하여 시를 생명의 목소리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