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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천상병 유고시집 『새』

by 언덕에서 2013. 11. 25.

 

 

 

천상병 유고시집 『새』

 

 

 

 

 

천상병(千祥炳 : 1930.1.29∼1993.4.28)의 시집, B5판, 126면으로 구성되며 1971년 [조광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1971년 천상병의 실종 사건으로 지인들에 의해 유고 시집 형식으로 발간되었으나, 그 후 천상병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는 것이 알려짐으로 해서, 살아 있는 시인으로서 유고집을 낸 국내 최초의 경우가 되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시인의 생계를 위해 지인들에 의해 1992년 도서출판 답계에서 초판 그대로 번각되어 출판하였다.  번각본에 부쳐 민영의 <새가 날아오다>라는 발문이 덧붙여졌다. <소능조(小能調)><나의 가난은><귀천(歸天> 등 모두 59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새 1

 

저것 앞에서는

눈이란 다만 무력할 따름.

가을 하늘가에 길게 뻗친 가지 끝에,

점찍힌 저 절대정지(絶對靜止)를 보겠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미묘하기 그지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는 무슨 상형(象形)인가.

 

저것은

무너진 시계(視界) 위에 슬며시 깃을 펴고

피빛깔의 햇살을 쪼으며

불현듯이 왔다 사라지지 않는다.

 

바람은 소리없이 이는데

이 하늘, 저 하늘의

순수균형(純粹均衡)을

그토록 간신히 지탱하는 새 한 마리.

 

 - 시집 <새>(조광출판사.1971) -

 

 

 천상병은 1967년 7월 동베를린 거점 문인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ㆍ무직ㆍ방탕ㆍ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고생하다가 1993년 4월 아침 식사 도중 갑작스럽게 변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삶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 시집 <새>(조광출판사.1971) -

 

 

 천상병의 시는 초기 시에서부터 일관되게 무소유적 가난, 외로움과 달관의 세계, 동심의 세계와 자유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부정적인 세계와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서는 동양적 달관의 자세로서 세계와 대결하고 있다.

 

 

 

 

 

 이 시집에는 1952년 문예지의 추천을 거친 후 1971년까지 발표한 시 60편(미발표작품 포함)이 작품의 발표연도 및 발표지와 함께 수록되었으며, 책의 말미에는 이 시집이 발행되기까지의 내력을 밝힌 김구용의 발문이 실려 있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 시집 <새>(조광출판사.1971) -

 

 수록작품을 살펴보면 첫머리에 실린 <편지>를 시작으로 <광화문에서><이스라엘 민족사><꽃의 위치에 대하여><은하수에서 온 사나이><그날은><소릉조(小陵調)>를 비롯해 이 시집의 표제시인 <새>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귀천(歸天)>, 마산중학교 시절 잡지 <문예>에 첫 추천을 받은 <강물><갈매기>, 이 시집에서 연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시 <피리>(1949) 등 모두 60편의 시로 구성되었다.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선

 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시집 <새>(조광출판사.1971) -

 

 이 시집은 천상병의 첫 시집으로, 물질만능의 시대에 작가의 삶과 문학이 일치하는 순수한 서정시의 세계를 펼쳐 보인 초기의 작품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집으로 평가된다. 천상병의 초기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순수한 시심(詩心)이 녹아 있는 서정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나의 가난은><소릉조>등의 작품을 통해 삶의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시인의 초월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그리움과 소외감의 정서를 노래한 <피리><갈대><들국화> 등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형이상학적 정서로 작품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렵고 불행한 생활로 이어지는 생애를 보내면서 삶의 어두움, 외로움, 죽음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시를 많이 지었다. 이러한 시를 쓰면서도 맑은 눈과 청순한 시정신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그는 맑고 투명하게 사물을 인식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순진무구한 시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현실 삶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말할 때에도 천진한 상상력을 잃지 않는다. 특히 세속 삶에 대한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버리는 소박한 정서는 죽음과 가난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허무주의와 구차함에 떨어지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당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