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중편소설 『기만(Die Betrogene)』
독일 소설가·평론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중편소설로 1953년 발표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번역자에 따라 <속임 받은 여인>·<기만 당한 여인>이라는 제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토마스 만의 후기 작품 중 하나로, 짧지만 깊은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노화와 젊음,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배신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귀부인 로잘리 부인은 뒤셀도르프에서 딸 안나, 아들 에두아르트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50세로, 고등학생 아들보다 미혼인 29세의 딸과 더욱 친밀하여 서로 고민을 나누며 자매처럼 지낸다. 딸은 안짱다리라는 육체적 결함을 갖고 태어났는데 지적이고 회화를 좋아하지만, 로잘리 부인은 열렬한 자연 애호가이고 여성적인 것에 대해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 그녀는 갱년기를 지나면서 월경이 불규칙해지고 지난 몇 달 동안은 그마저 그치자 이제 여자로서 껍데기에 불과하다며 정신적으로 침체를 겪는다. 그러던 중 아들의 영어 과외 교사인 미국 청년 캔 키톤을 짝사랑하게 되고 다시 월경하자, 자신의 정신적 회춘이 육체적 회춘으로 이어졌다며 좋아한다. 딸의 이성적인 만류에도 그녀는 캔에 사랑을 고백하는데, 그날 밤 피가 많이 나오면서 정신을 잃는다. 자궁을 비롯하여 복막 전체에 암세포가 퍼져서 출혈이 일어났던 것으로, 주인공은 자신이 그렇게도 칭송했던 자연에 의해 기만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이 회춘과 사랑의 형태로 찾아왔다며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토마스 만의 주제인 정신과 육체, 삶과 죽음의 모티브가 패러디 풍으로 묘사된 이 작품은 국내에서는 1959년 박찬기에 의해 처음 번역 출판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자연을 사랑하는 50대 후반의 미망인 로잘리 폰 튀믈러(Rosalie von Tümmler)는 남편을 잃은 뒤, 미술가로 활동하는 딸 안나와 대학 입시를 앞둔 아들 에두아르트와 함께 안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귀족 가문 출신의 로잘리는 순리대로 나이 들어가는 삶을 관조하며, 별다른 사건 없이 포근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어딘가 권태롭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대를 지망하는 아들에게 꼭 필요한 언어, 즉 영어를 가르치고자 머나먼 미국에서 건너온 과외 교사를 들이게 된다. 스물넷의 청년, 켄 키튼(Ken Keaton)은 지난 세계 대전 동안 군인으로 복무하며 유럽을 사랑하게 된 인물이다.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 건장한 육체, 진지한 독일 사람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유쾌한 유머 감각! 아들 에두아르트뿐 아니라 로잘리까지 순식간에 매료된다.
최초의 두근거림은 점차 애틋한 연정, 뜨거운 열망으로 변해 가고 로잘리는 마침내 켄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성적인 안나(Anna)는 어머니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 위험한 충동을 눈치채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그러나 로잘리는 오히려 매사에 합리적인 잣대만을 들이대는 딸을 비난하며 자신의 열정을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꽃이 만발한 여름날, 튀믈러 가족과 켄 키튼은 교외로 짤막한 소풍을 떠나고 운명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로잘리는 과외 교사와의 관계에서 젊음과 다시금 살아나는 열정을 느끼지만, 이 감정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인생의 현실, 즉 죽음과 쇠락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대치하게 만든다. 그녀는 신체적인 변화로 인해 다시 생리를 시작하게 되면서 일시적으로 자신이 젊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암의 증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즉, 로잘리가 다시 젊어진다는 느낌은 순전히 그녀 자신의 망상이고, 그녀는 자기 몸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로잘리는 자신이 속고 있었음을 알게 되며, 이 깨달음은 그녀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긴다. 작품은 로잘리가 자신과 삶, 육체의 변화에 대해 깊은 혼란과 배신감을 느끼며 끝난다.
중편소설『기만』은 토마스 만의 마지막 작품이자 <베네치아에서 죽다>와 함께 그의 문학적 주제 의식, 오래도록 교전해 온 내적 갈등과 최후의 순간까지 차마 고백하지 못한 내밀한 욕망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노벨레다. 철학자이자 비평가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거짓된 삶의 비극을 보여 주는 『기만』은 모든 규칙을 위반하며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준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무한한 해방감을 느꼈다.”라고 찬탄하였듯이 이 소설은 뛰어난 문장력과 파격적 구성, 토마스 만의 작품으로서는 무척 이례적인 여러 특색을 지니고 있다. 가령 패러디와 아이러니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끝내 완성하지 못한 장편 소설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의 문제의식과 희극적 기법을 선취해 냈다는 점이다.
비록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완성하고 죽었지만 『기만』은 거장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토마스 만은, 비평가 한스 마티아스 볼프의 지적대로 “마침내 『기만』에서 한평생 품어 온 갈등을 해소하고 모순과 화해”할 뿐 아니라, 이렇듯 자기 기만과 고뇌를 정면 돌파하며 통찰과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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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기만』은 짧은 분량 속에서 삶과 죽음, 노화와 젊음, 욕망과 환상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이 나이 듦에 따라 피할 수 없이 맞닥뜨리는 현실 특히, 육체의 쇠락과 죽음에 대한 토마스 만의 시선을 담고 있다. 로잘리의 자각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속임과 기만에 빠질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젊어지려는 욕망은 단순한 낭만적 사랑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삶을 다시금 움켜쥐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이다.
또한, 작품에서 다루는 질병이라는 요소는 만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모티프이다. 토마스 만은 인간의 정신과 신체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깊이 탐구했다. 이 작품에서는 암이라는 신체적 질병이 정신적 기만과 연결되어 있다. 로잘리의 암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적 혼란과 욕망의 실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이다. 토마스 만은 『기만』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과 욕망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특히 노화와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인간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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