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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가을날(Herbsttag) / 라이너 릴케(Rainer Rilke)

by 언덕에서 2024. 9. 27.

 

 

가을날(Herbsttag)

 

                                                                  라이너 릴케(Rainer Rilke, 1875~1925)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번역 : 송영택】 

 


【원문】 

 

Herbsttag

 

                                     Rainer Rilke(1875~1925)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ß.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Befiehl den letzten Früchten voll zu sein;

 

gi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

 

drä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üß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

 


 

 독일 시인 라이너 릴케의 시로 종교적 형이상학에 기초한 낭만적ㆍ신비적 서정시이다. 『형상시집(形象詩集)(Das Buch der Bilder)』(1902)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가을에 느끼는 서정으로 신의 섭리와 인간의 실존 깊숙이 자리 잡은 근원적 고독에 대한 성찰을 주제로 다루었다. 기도조로 일관된 표현은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신과 시인이 서로 대화하는 듯한 시풍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빛과 어둠, 원숙함과 고독 등이 어우러져 이루어낸 아주 독특한 가을의 교향시이다.

 이 시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의한 서정시로서, 작가는 모든 물상은 신의 은총에 의하여 생성ㆍ성숙ㆍ결실된다고 믿고, 그러한 위대한 힘을 가진 신은 또 자기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자기의 기도하는 바를 다 들어주신다고 설명함으로써 신과 자신과의 친근함과 자연과의 교감을 표현한다. 조용한 어조와 잔잔한 호흡, 어린이와 같은 청신한 감성을 드러낸 작품이다.

 릴케의 시심 생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사실 중의 하나는 위대한 조각가 로댕과의 만남이었다. 로댕의 비서가 된 릴케는 스승으로부터 사물을 보는 눈과 형식(Form)을 형성하는 것을 배웠다. 이 시는 릴케가 처음 로댕과 만난 1902년 9월에 쓰였다. 사물을 명확하게 꿰뚫어 보려는 노력과 현실 세계에서 살려고 하는 결의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시이다.

 제1∼2연은 가을의 맑고 풍성함으로 나타내어 외적으로 충실한 계절을 표현하였고, 제3연은 낙엽이 뒹구는 가로수 길을 방황하게 될 사람과 고독한 사람을 그려 가장 고독한 계절로서 가을의 특성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제3연의 고독은 비애ㆍ감상ㆍ절망을 배제하고 글을 읽고, 편지를 쓰고, 가로수 길을 산책하는 사색의 고독을 그리고 있다. 이는 내적 충실을 위해 고독을 희구하는 사람의 고독이다. 즉, 이 시는 가을의 외적 충실과 내적 충실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송영택(宋永擇.1933∼ ) : 시인ㆍ번역가. 호 청서당(聽黍堂). 부산 출생. 충북 청주시 금천동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 졸업 후 1956년 [현대문학]에 시 <소녀상(少女像)>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보고서(報告書)>(1956.현대문학) <풍경>(1958.현대문학) <간주곡(間奏曲)>(1959.현대문학> 등의 서정적인 작품을 계속 발표, 활발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했다. 1970년 문인협회 사무국장, 서울대학교 교수 역임. 시작활동을 하는 한편, 독문학의 번역에 힘써 <릴케시집>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등의 번역서가 있다.

【작품】<소녀상>(1956) <보고서>(1956) <풍경>(1958) <간주곡>(1959) <가을의 코스모스> <연가>(1959.신태양) <10월 서정>(1965.현대문학) <네가 있던 자리>(1967.현대문학) <상실>(1973.한국현대시선)

【시집】<가난한 산책>(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