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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안녕, 안녕 / 박남수

by 언덕에서 2015. 12. 8.

 

 

 

 

 

 

 

 

 

안녕, 안녕 

 

                                                                     박남수(1918 ~ 1994)

 

1. 

눈총의 난타를 맞으며

실의를 부끄러움으로 바꾸어 지고

돌아오는 금의환향의 입구를

몰래 빠져나가는 좁은 출구에서

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비뚤어진 다리를 옮긴다


인사는 못하고 떠나지만

통곡하며 갔다고 전하여다오


2.

언어를 캐던 하얀 손으로는

석탄도 소금도 캐기는 어렵지만

생활의 물결의 높낮이에, 어쩌다

솟아보는 머리를 쳐들고

새처럼 날아보았으면

새처럼 날아보았으면

 

그만둘 직장도 없는

정년퇴직의 나이를 꽃지게에 지고간다


3.

웃지 말라, 꾸짖지도 말라

쉽게 이야기하지 말라

때리는 채찍은 장난이겠지만

맞는 개구리의 배는

생명과 이어지는 아픔

한 사람의 깊은 아픔은 누구도 달래지 못한다


안녕은 못하고 떠나지만

잊지 않을거라고 전하여다오

 


- 시집 <그리고 그 이후> (문학수첩 1993) 


 


 

박남수 시인(1918 ∼1994) 은 1970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시가 실릴 정도이니 우리 문학사에 비중이 대단한 분이다.

 

'(전략)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아침 이미지'라는 주지시는 과거 고교시절 대학 예비고사와 본고사에 무척 어려운 문제로 출제되어 나온 관계로 위의 시인은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인에게도 정든 땅에서 밥 먹고 살아가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박남수 시인은 유신시절인 1975년 58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19년 후인 1994년 미국 뉴저지 주 자택에서 별세한다. 1992년 부인과 사별한 그는 1993년 4월에는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었다.

 빛나는 감성의 소유자인 노시인이 조국을 등지고 이역 나라로 가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타국으로 내몰았을까? 위의 시에서 그 실마리들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일단 1연의 실의로 인해 비틀거리며 통곡을 하는 모습에서는 읽는 이 누구에게나 심각함을 느끼게 한다. 2연에서는 좀더 구체화된 내용으로 나타난다. '시작'만 해오던 언어를 캐던 하얀 손으로 그것도 정년퇴직을 할 나이에 새처럼 날아보았으면 하는 갈망 하나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다. 3연에서는 그 동기를 개인적인 아픔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 다음은 독자의 몫이다. 60살이 다된 나이에 조국을 등지고 떠나는 이의 심경을 적은 시에 다른 관념이 끼어들기는 힘들어 보인다.

 어떤 고도한 의식의 그것보다도 아주 일상적인 개인사의 고민이 온몸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 시인이 1939년 조지훈ㆍ박두진ㆍ박목월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장]지를 통해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 1994년 미국에서 사망하기까지 그의 문학적 삶과 시의 역정이 남달랐음을 이해하고 보면, 저간의 사정은 더욱 짙게 우리에게 공감시키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51년 월남했고, 다시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해 살았다. 연속된 실향, 평생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그는 이른바 ‘경계인’이었다.

 위의 시는 그의 시집『그리고 그 이후』(문학수첩, 1993)에 실려 있다. 이 책은 그간 그의 다른 시집들과는 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우선, '이 시집을 사랑하는 아내 강창희의 영전에 드린다>'는 헌사가 붙어 있다. 흔히 이런 헌사는 수록된 내용에 관계없이 붙여지기도 하지만 경우가 다른 무엇이 있어 보인다. 수록된 48편의 시들은 시인이 책머리에 쓰고 있듯, 아내의 돌연한 죽음으로 받은 충격과 그로 인해 죽음과 그 이후를 생각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내용들로 일관되고 있다. 그런 만큼 소재적이고 의식적이라는 점에서 시적 본질로서의 수용에 다소 방해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든 비유'가 아닌, '살아 있는 비유'의 실체를 거기서 만나고 놀라기도 한다. 진정한 비유는 우리의 삶에 구속의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열어 주는 힘, 근원적인 자유를 허락한다는 말은 언제나 옳다. 거듭 확인하지만, 비유는 시와 삶의 남다른 시간의 굴절과 공간의 이동을 직접 체험해 온 시인의 새처럼 날아보았으면 하는 자유로움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