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고자료

문예 동인지 [백조(白潮)]

by 언덕에서 2024. 10. 4.

 

문예 동인지 [백조(白潮)]

 

 

1922년에 창간되었던 순수한 문예 동인지로 [창조] [폐허]와 함께 3ㆍ1운동 후의 3대 동인지. 1922년 1월 박종화ㆍ홍사용ㆍ나도향ㆍ박영희 등이 창간하였다. 편집인은 홍사용, 발행인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고 외국인을 택했는데, 1호는 아펜젤러(미국인 선교사, 배재학당 교장), 2호는 보이스 부인(미국인 선교사), 3호는 훼루훼로(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이다.

 김덕기와 홍사용의 재종형(再從兄)인 홍사중이 자금을 내 [경성문화사]에서 발행하였다. 컷ㆍ장정ㆍ표지는 안석주와 원세하가 맡았다. 격월간으로 계획된 것이나 발간이 순조롭지 못하여 1922년 5월에 2호, 1923년 9월에 3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발행 동기는 휘문의숙 출신의 박종화ㆍ홍사용과 배재학당 출신의 나도향ㆍ박영희 등의 문학청년들의 사귐에서 비롯되었다.

 3ㆍ1운동이 실패한 뒤 절망적 상황에서 이들 뜻이 맞는 젊은이들이 모여 문예와 사상을 펼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마침 김덕기ㆍ홍사중과 같은 후원자를 만나 문화사를 세웠고, 문예잡지 [백조]와 사상잡지 [흑조(黑潮)]를 간행하기로 하였으며 그 제일보로 [백조]를 창간하였다.

 제1호에 박종화의 시 <밀실로 가다>를 비롯하여 이상화의 <말세의 희탄(欷嘆)>, 나도향의 소설 <젊은이의 시절>, 1922년 5월에 간행된 제2호에는 나도향의 소설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현진건의 <유린>, 박영희의 시 <꿈의 나라로>, 홍사용의 <봄은 가더이다>, 박종화의 <흑방비곡>, 1923년 9월에 간행된 제3호에는 시에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 홍사용의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박종화의 <사의 예찬>, 소설에 나도향의 <여이발사>, 박종화의 <목매는 여자>, 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 희곡에 박종화의 <죽음보다 아프다>(전1막) 등이 실려 있다.

 [백조]의 문학적 경향을 흔히 낭만주의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나, 그것은 시 분야에 국한된 일이고 소설 분야에 있어서는 역시 당시의 유행하는 사조인 자연주의적인 성격이 짙다. 당시의 동인지는 어느 뚜렷한 문학적인 주의나 사조에 의하여 뭉친 동인이기보다는 문학 동호인의 친교적 성격이 강하였던 만큼 무슨 주의 일색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흔히 ‘백조파’로 묶어서 지칭하고 있는바 그들의 문학적 경향은 서구의 낭만주의와는 달리 병적이고 퇴폐적인 면이 강하였다. 이는 3ㆍ1운동이 실패한 뒤 허탈한 느낌에서 문학을 시작한 청년 작가들의 정신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요컨대 이들 ‘백조파’ 시의 특징은 애수ㆍ비탄ㆍ자포자기, 죽음의 동경, 정신적 자폐증 등의 감상적 경향을 제대로 시로써 승화하지 못한 채 격정적이거나 애상적인 어투로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인】홍사용, 박종화, 나빈, 박영희, 이상화, 현진건, 노자영, 안석영, 원우출, 이광수, 오천석, 박종화 등.

【사조】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출발했으므로 정신적 기조는 3ㆍ1운동 실패 이후의 암담해진 세태에 대한 실의와 비탄이 주류를 이룬 낭만성이었다. 그래서 이 ‘백조파’를 흔히 ‘낭만파’라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주로 시를 통하여 강하게 풍겼으며 소설은 자연주의 경향이 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