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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심훈(沈熏) 시나리오ㆍ감독의 영화 <먼동이 틀 때>

by 언덕에서 2024. 8. 20.

 

 

심훈(沈熏) 시나리오ㆍ감독의 영화 <먼동이 틀 때>

 

 

시인소설가언론인영화인 심훈(沈熏, 1901~1936)이 시나리오를 만들고 감독한 영화로 1927년에 계림영화사가 제작하여 10월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하였다. 신일선ㆍ한병용ㆍ강홍식ㆍ이시이ㆍ김정숙 등 배우들과 함께 심훈 자신도 출연하였다. 제작자 최건식, 원작⋅감독⋅각색에 심훈, 미술감독에 안석영이 맡았다. 이 영화가 단성사에서 상영된 것은 1927년 10월 26일부터 6일 동안으로 나운규(羅雲奎)의 <아리랑>(1926)에 이어 만들어진 한국 영화 개척기의 또 하나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졌다.

 1920년대, 암담한 일제 식민지 아래의 사회를 배경으로 억울한 누명으로 좌절하는 광진과 이상향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나는 남녀를 통해 이 영화는 심훈의 초기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매우 사실적이고도 인물의 묘사가 극명하여 무성영화시대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명작의 하나로 꼽힌다. 심훈은 시나리오와 영화 평론을 많이 남겼지만 직접 감독한 작품은 아쉽게도 <먼동이 틀 때> 한 편으로 그쳤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하던 주인공 광진(光鎭)이 출옥한다. 수감 중에 헤어졌던 아내를 찾아서 헤매던 광진은 한 식당에서 돈에 팔려 온 처녀 순이(順伊)를 우연히 알게 된다. 순이에게는 암담한 세상을 비탄하는 시인 조영희(趙永熙)라는 애인이 있다. 광진은 딱한 처지에 있는 순이와 영희를 몹시 동정한다.

 한편 광진은 계속해서 아내를 찾아 헤매지만 같은 서울의 하늘 아래에서 책 장사하는 아내와 만나지 못한다. 실망한 광진은 이즈음 순이가 건달패에 희롱까지 받게 될 위험에 놓인 것을 알고 자신이 감옥생활을 하며 모았던 돈을 몽땅 털어 순이의 몸값을 갚아준다. 젊은 두 남녀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뒤 광진은 아내와 비슷한 여인의 집을 찾아 숨어 들어간다. 이때 광진은 오래전부터 아내를 연모해 온 건달패 두목이 자기 아내를 범하려는 것을 보고 뛰어든다. 광진은 건달패 두목을 몰아 이 층의 창문에서 떨어져 죽게 하고 만다. 광진은 10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와 재회하여 얼싸안게 되었지만, 형사들에 의하여 붙잡혀 다시 형무소로 끌려가게 된다.

 한편, 먼동이 틀 무렵 이처럼 암담한 현실에서 사랑과 이상이 있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두 젊은 남녀가 길을 떠나고 있었다. 순박한 처녀 순이와 젊은 시인 조영희였다.

 

 

 이 영화는 1927년 10월에 개봉된 심훈이 각본,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자기 영화소설 <탈춤>을 영화화하던 도중 제작비 문제로 난항을 겪자, 전과자를 다룬 신문 기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하루 만에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이 영화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나운규의 <아리랑>을 통해 촉발된 조선 영화 붐이 편승한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기 대다수의 조선 영화들처럼 이 영화 역시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흥미를 끄는 이유는 이 영화를 둘러싼 논쟁의 기념비적 성격 때문이다.

 실제로 이 영화를 두고 제법 많은 영화평이 쏟아졌는데, 그 중의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한설야(韓雪野)―심훈(沈熏)―임화(林和)로 이어지는 논자들의 첨예한 ☞논쟁이다. 이 논쟁은 논자들의 면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학 쪽에서 한창 진행 중이던 계급 이데올로기적 비평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논쟁의 수준은 문학에 비하면 상당히 거칠지만, 영화작품을 두고 벌어진 초기 비평 논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점에는 계급운동의 관점에서 영화평이 이미 산발적으로 나오고 있었지만, 한 작품을 두고 본격적인 논쟁을 벌인 사례는 <먼동이 틀 때>가 거의 최초라고 평가된다.

 

 


☞논쟁의 개요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먼저 논쟁의 불씨가 된 글은 한설야의 것으로, 7일에 걸쳐 [중외일보]에 게재된 장문의 이 글은, 이전까지 개봉한 대수의 조선 영화들을 계급 투쟁적 관점에서 무차별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대부분의 조선 영화는 아메리카니즘과 연애지상주의를 주요 소재로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먼동이 틀 때> 역시 이러한 비판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설야에게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 그는, “청춘남녀의 사랑을 위하여 한 몸을 희생하는 그러한 썩은 사람을 조선은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비판의 날을 세운다. 주인공에 대해서는 <희무정(噫無精)> 속의 장발장을 흉내 내려 했으나, 그때와 지금은 아주 상황이 다르며, ‘조선의 먼동은 그같이 싱겁게 트지 않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심훈은 이러한 한설야의 비판에 대해 장문의 반론을 [중외일보]에 게재하며, 조목조목 반박한다. “(중략) 둘째는 작품의 거친 플롯만을 추려서 시비를 가리려는 것은 적으나마 종합예술의 형태로 나타나는, 영화의 비평이 아니니, 예술 이론상으로도 근본적으로 착오 된 것이요, 셋째는, 마르크시즘의 견지로서만 영화를 보고 이른바 유물사관 변증법을 가지고 키네마를 척도하려 함은 예술의 본질조차 해득하지 못한 고루한 편견에 지나지 못함이요, (중략) 농부나 노동자가 나와서 거지 노릇을 하는 것만이 신흥예술이 아니요, ‘빵’ 문제만 취급한 것이 프롤레타리아의 영화가 아니다. 말하자면, 부르주아지의 생활에서 온갖 흑막을 들추고 갖은 죄악을 폭로시켜서 대중에게 관조의 힘을 가지게 하고, 그들이 대상에게 증오감과 투쟁 의식을 고부시키는 간접적 효과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 신흥예술의 본질이요, 또한 사명이 아닐까?”

 이 반론에서 단연 흥미로운 것은 거친 플롯만을 추려서 시비를 가리려는 한설야의 비평이 종합예술인 영화의 비평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심훈의 주장이다. 물론 종합예술인 영화의 비평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심훈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계급투쟁의 논리에만 함몰되지 않고, 영화 매체의 특성까지 함께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훈의 균형 있는 시각이 돋보인다.

 그러나 심훈이 그러거나 말거나 임화는 심훈의 견해에 대해 일부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시즘에 의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민중적인 견해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며, 계급투쟁의 관점을 더 우위에 두며, 심훈을 비판한다. “우리는 물론 운동이 예술 영역에 있느니만큼 예술작품을 생산해야 할 것은 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한 것은 예술 영역의 재(在)한 대중의 획득이 그 관심의 초점이란 것을 (중략) 우리의 투쟁을 참가케 하며, 투쟁의 무기로 사용하는 우리의 절대적인 역할이 전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품을 제작하는 것은 우리의 즉 프롤레타리아의 예술품은 한 개의 골풍(骨風)으로 진열대에 두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전선(戰線)으로 동원해 지배계급의 아성으로 육박(肉迫)시키는 거기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임화의 비판 논리 이면에는 단체의 문제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보라! 만일 심훈 군이 프롤레타리아의 영화에 유의하는 양심이 털끝만치라도 있다면, 그는 곧 우리의 유일한 투쟁적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것은 개인의 힘보다는 조직의 힘이 크고 우리 무산자(無産者)에게 유일한 무기는 단결이란 것은 3세 유아라도 잘 아는 것이기 때문에 (중략) 그는 예술동맹의 일원이 되어 전체 운동의 일환인 예술에 의한 적극적인 활동을 개시할 것이다.”

임화의 이런 논리에는 영화 매체가 가진 특성에 대해 고려는 부재하다. 10여 년 뒤 <조선 영화론>을 통해 조선영화사 전체를 체계화하던 통찰력 있는 시각을 이 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청년 시절의 거친 패기가 느껴지는 글이다.

 이처럼 한설야―심훈―임화의 영화 논쟁에서 영화는 부차적인 요소로 다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논쟁의 중요성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논쟁의 중심 화두는 아니었지만, 논쟁의 활성화로 인해 당시 제작 환경과 검열의 문제, 아메리카 영화에 대한 문제가 함께 논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 중의 하나는, 이 논쟁의 표면에 드러난 유물사관적 논리의 대결 그 자체보다는 ‘논쟁’이라는 의사소통 구조를 통해 제출되었던 영화 매체에 대한 사유(思惟)였다.

 즉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촉진된 영화 비평과 논쟁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화 매체에 대한 사유의 파장을 끌어낸 것이 사실이며, 이는 다시 조선에서의 영하와 그 영화가 가진 문화적 위상 변화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존의 카프영화 운동을 평가하던 관점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을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