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전쟁 멜로드라마 <해바라기(Girasole)>
영화 <해바라기(I Girasoli)>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가 감독한 작품으로 1971년 발표되었는데 전쟁이 남긴 상처와 사랑의 상실 그리고 인간의 희망과 회복력을 다뤘다. 극적인 스토리 전개만큼 소피아 로렌 (Sophia Loren, 1934~)의 강렬한 연기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Marcello Mastroianni, 1924~1996)의 섬세한 연기, 비토리오 데 시카의 서정적인 연출이 조화를 이루며 관객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준다.
<해바라기>는 서방 영화로는 처음으로 소비에트 연방에서 촬영된 영화다. 소련의 국화가 해바라기이고, 소련의 일상 모습이 담겨 국내에는 상영이 금지되다 1982년에야 겨우 개봉을 했다. 이 영화는 <애수>(1940)와 함께 전쟁 속 비극적 사랑이야기의 최고작으로 꼽히며,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에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에서 헨리 만치니(Henry Mancini)의 테마 음악 “잃어버린 사랑(Loss of Love)”이 울려 퍼지는 첫 장면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 <해바라기>는 이탈리아·프랑스·소련 등 3개국이 합작한 작품으로, 이탈리아의 두오모 대성당과 밀라노 중앙역 그리고 소련의 크렘린 궁과 붉은 광장, 우크라이나 해바라기 대평원 등 세계적인 명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대평원의 아름다운 해바라기밭은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불법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군의 전차에 짓밟히는 안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의 불법 침공에 대한 강한 반전(反戰)의 메시지와 함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3월에 <해바라기>가 전국 80개 극장에서 재개봉되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영화 <해바라기> 속 해바라기밭은 2차세계대전 러시아 전선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전쟁사가(戰爭史家)들에 의하면 주인공 안토니오가 참전한 지역은 '동부전선(Eastern Front)'으로 이곳은 나치 독일과 소련 간의 주요 전쟁 지역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연합(약칭 : 소련)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전선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군은 독일군과 협력하여 '동부전선'을 침공했다. 영화의 실제 촬영 장소는 동부전선의 폴타바(Poltava) 지역인데, 이곳은 실제로도 해바라기밭이 넓게 펼쳐진 지역으로 영화의 상징적인 장면들이 촬영된 곳이다.
폴타바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해바라기 재배로 유명하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최대의 해바라기유 생산국으로 해바라기는 그곳의 상징적인 농작물 중 하나다. 영화에서 이 지역의 넓은 평야와 해바라기밭은 전쟁 후 황폐해진 느낌을 전달하는 완벽한 배경을 제공했다. 지금도 폴타바 지역은 여전히 해바라기밭이 널리 분포된 곳으로, 그 독특한 풍경은 당시 영화 촬영에 적합했던 이유를 그대로 보여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의 젊은 부부, 지오반나(소피아 로렌)와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독일의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동조하여 독일과 이탈리아는 동맹이 된 상태다. 독일이 소련과 맺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 본토를 공격하자 이탈리아 군대가 독일을 지원한다.
이탈리아의 나폴리에 살던 조반나(소피아 로렌 분)는 밀라노에서 온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분)와 사랑에 빠진 상태다.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둘은 결혼식을 올리지만 남편 안토니오는 이내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징집된다. 그리고 남편을 기다리던 조반나가 받은 것은 한 장의 전사 통지서이다.
이렇듯 전쟁의 참혹함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남편의 사망을 믿을 수 없는 지오반나는 절망 속에서도 남편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지오바나가 안토니오를 찾아 헤매는 모습은 눈물겹기 짝이 없다.
"그는 살아 있어요.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어요. 그는 죽지 않았어요."
이러한 확신은 사랑하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애통한 마음은 그 사랑을 부여잡기 위한 몸부림이다.
남편이 살아있다고 확신하는 조반나는 소련으로 건너가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찾아내지만 그는 전투 중 입은 충격으로 부대에서 낙오되어 헤매다가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안토니오는 소련 여인 마샤를 만나 딸을 둔 아버지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당연히 지오반나는 충격을 받으며, 자신의 사랑과 남편의 새로운 삶 사이에서 갈등하다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녀는 공장 일꾼 에토와 결혼한다. 아들도 한 명 낳고 그럭저럭 살아가던 조반나에게 기억을 되찾은 안토니오가 다시 나타나자, 그녀의 삶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미 그녀 또한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전이 되어 그림자 속에 있던 안토니오가 지오바나의 촛불 앞으로 나오자 둘은 포옹한다.
마지막 장면, 기차역은 우수와 회한을 담는 공간이다. 지오바나와 안토니오가 다시 그곳에 서는데 자신의 청춘과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장면이다. 그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다. 기차는 떠나고, 지오바나는 또다시 오열한다. 평생을 바라본, 그리운 사랑은 그녀에게서 영원히 멀어지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를 보면서 특히 소피아 로렌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성적인 연기가 가슴을 울렸다. 이탈리아 특유의 밝고 경쾌한 초반과 달리 전쟁 이후 무너져 내리는 여인의 정한을 한없이 쓸쓸하게 연기한다. 머리까지 희끗해진 중년 여인 지오바나는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한 아픔을 잘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 ‘해바라기'는 두 사람의 잃어버린 사랑과 전쟁의 상흔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쟁터로 변한 '유럽의 빵 바구니'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밭은 그들이 꿈꿨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음을 확인시키는 중요한 배경이다. 지오반나가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을 배경으로 안토니오의 흔적을 찾는 장면은 영화의 가장 상징적이고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이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해바라기들은 어느 선량한 부부의 사랑을 전쟁이 무참하게 짓밟았음을 표현한다. 또한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은 지오반나의 절망과 남편을 찾고자 하는 헌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장면에서 소피아 로렌의 감정 표현이 극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녀의 내면적 갈등과 상실감이 관객의 가슴을 흔든다.
지오반나와 안토니오가 우크라이나에서 첫 번째 재회하는 순간 또한 눈여겨봐야 할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로 주인공 지오반나는 남편의 새로운 삶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그녀는 남편과 지신의 부부로서의 모든 삶이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피아 로렌의 눈빛과 침묵 속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그녀의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순간의 섬세한 연기와 상반되는 안토니오의 무감각함은 인간관계의 복잡함과 전쟁이 남긴 폭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오반나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면서 나타나는 전쟁의 상흔과 앞으로의 삶을 수용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전체적인 주제를 정리한다.
♣
영화 <해바라기>는 소피아 로렌의 압도적인 연기가 빛을 발하는 영화이다. 전쟁의 파괴력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을 지키려는 한 여인의 복잡한 심리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여주인공 지오반나는 전쟁의 단순한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전쟁이 인류에 남기는 상흔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생히 전달한다.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비토리오 데 시카의 감각적인 연출이다. 그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적인 감정에 더욱 깊이 파고들며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모든 상실을 탁월하게 시각화했다. 해바라기밭이라는 상징적 배경은 단순한 전쟁의 흔적이 아닌, 사랑이 끝나버린 자리를 상징하며, 자연과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환기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도 아름답다. 특히 이탈리아와 소련의 대조적인 풍경은 두 주인공이 생존하는 삶을 표현하며, 서정적인 음악과 함께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헨리 만시니가 작곡한 서정적이고도 비통한 음악은 영화의 멜랑콜리한 정서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여배우 소피아 로렌의 대표작 가운데 국내 영화 팬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해바라기>는 해외에서는 1970년에 개봉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국내에서는 당시에 개봉되지 못하다가 1982년 지각 개봉되어 대흥행을 거두었다. 이후 MBC <주말의 명화>를 비롯하여 EBS 등 다양한 지상파 TV를 통해 수차례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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