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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서머싯 몸 장편소설 『면도날』

by 언덕에서 2024. 4. 1.

 

 

서머싯 몸 장편소설 『면도날(The Razor's Edge)』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장편소설로 1944년 발표되었다.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면도날』은 1930년대 유럽, 그 풍요와 야망의 시대를 배경으로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한 젊은이의 구도적 여정을 그린다.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와 함께 서머싯 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장편소설『면도날』은 날카로운 면도날을 넘어서는 것처럼 고되고 험난한 구도의 길을 선택한 한 젊은이를 통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구원’이라는 다소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특유의 명쾌하고 간결한 문체와 유머를 잃지 않아, ‘소설은 재미를 위한 것’이라는 자신의 문학관을 이 작품에서도 성공적으로 보여 준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은 주인공 래리의 구도적 여정이다.

 

영화 [면도날], 1947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리노이주의 시골 마을에서 평범하게 자란 래리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비록 어려서 부모를 잃었지만, 유복한 후견인 집안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래리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교회에도 나가고 골프도 즐기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사귀어 온 예쁜 여자 친구와의 결혼도 아무런 장애 없이 받아들일 만큼 그의 미래는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소박한 기대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로 래리의 삶은 보통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궤도에 들어선다.

 부대에서 친해진 쾌활한 친구가 교전 중에 자신을 구해 주고는,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친한 동료가 한순간에 고깃덩이로 변해 버리는 것을 목격한 뒤로, 그는 자신의 인생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삶의 날카로운 일면을 경험한 그는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질문들에 사로잡힌다.

 결국 래리는 안정된 직장과 결혼을 앞둔 약혼녀, 평범하게 상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버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답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래리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고 머리와 가슴 모두로 이해할 수 있는 답을 찾아 프랑스의 탄광과 수도원, 독일의 농장, 스페인과 이탈리아 곳곳을 거쳐 인도의 아슈라마로 이어지는 긴 여행을 떠난다.

 한편 래리의 약혼녀 이사벨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래리와 전혀 다른 결단을 내린다.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함께 자라서 래리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는 이사벨이지만, 전쟁에서 돌아온 래리가 예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져 불안해한다. 결혼은커녕 취직할 의지도 없이 빈둥거리는 래리를 보다 못한 이사벨은 파리에 가서 2년간 원하는 공부를 실컷 하고 돌아오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약속한 2년이 다 흐르도록 래리가 “바보 같은 소리”만 늘어놓자 미련 없이 그를 포기한다. 사랑 대신 안정되고 화려한 생활을 선택한 이사벨은 래리의 친구이자 재벌 2세인 그레이와 결혼한다.

 래리의 주변 사람들도 “인생을 최대한 쓸모 있게 사는 법”에 대해 저마다 답을 찾아간다. 사랑과 모피 코트를 끝내 바꿀 수 없었던 약혼녀 이사벨, 잘나가는 증권회사 사장에서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된 친구 그레이, 남다른 감수성으로 세상을 노래하지만, 운명의 모진 배신을 견디지 못한 고향의 꼬마 아가씨 소피, 꿋꿋한 태도로 황량한 자기 삶에 온기를 부여한 동거인 수잔……이들은 각기 세상과 부딪치고 화해하면서 자기 고유의 빛깔을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영화 [면도날], 1947

 

 서머싯 몸은 많은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 통찰과 발견을 제공한 20세기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91세까지 사는 동안 장편소설 20편, 희곡 25편, 여행기와 평론집 11편, 단편소설 100편을 완성해 “정력의 작가”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치밀한 구성으로 주인공뿐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이 발산하는 젊음의 색깔들을 고르게 펼치는 『면도날』은 움츠러든 청춘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 회상록 <요약(The Summing Up)>에서 “나는 20대에는 비평가들의 잔인한 평을 받았으며, 30대에는 건방지다는 평을, 40대에는 냉소적이라는 평을, 50대에는 유능하다는 평을, 그리고 60대에는 천박하다는 평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여러 가지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이 시대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아름답게 진열한다. 결국 그것이 개인적인 행복이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면도날』의 인물들은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에 당당하고, 그것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세속적 삶 속에 숨어 있는 성스러움의 씨앗을 볼 수 있다. 세속적 삶과 가장 동떨어진 래리조차도, 긴 여행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현실과의 접점을 만들어 나간다. 이로써 작가는 시끌벅적하고 서로 부대끼는 구체적인 현실이 마냥 천박하고 비루한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구현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작품 속 시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대공황기를 거쳐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다. 여러 굵직한 사건들로 인해 전통적 가치가 붕괴하고 새로운 가치는 미처 성숙하지 못한 사회적 혼란기이다. 하지만 『면도날』은 이 혼돈을 소모적인 허무주의나 현실 도피로 연결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허영과 불안에 주목하기보다 래리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몰입한다.

 소설 속 래리의 구원은 동양적 세계관과 닿아 있다. 래리는 로이스부르크 같은 신비주의자의 책을 탐독하고, 개개인의 영성스러운 변화에서 구원을 찾으며, 방랑자의 면모를 풍긴다. 이것은 서머싯 몸 자신의 관심과도 일치한다. 실제로 몸은 젊은 시절 인도 여행을 통해서 많은 철학적 영감과 얻으며, 그 경험을 이 소설에서 생생하게 녹여 낸다.

 이 작품은 세상이 정해 놓은 레일을 뛰어넘은 작중 주인공 래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 준다. 누구에게나 잠재하는 숭고함의 씨앗은, 삶을 통해서 증명될 때 비로소 명징한 빛을 밝힐 수 있음을 역설한다. 동시에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숭고함을 절대시하기보다, 가치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 채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의 삶에서 감동과 공감을 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