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 단편소설 『곰(The Bear)』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1897∼1962)의 단편소설로 1942년 발표된 단편집 <모세여 내려가라와 다른 이야기들>에 수록되었다. 단편소설 「곰」은 백인 소년 아이작이 최고의 사냥꾼 샘과 전설적인 늙은 곰 올드벤을 만나 진정한 숲의 주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포크너의 주요 장편소설들에서 보이는 난해한 절망감에서 탈출한 최초의 작품이며 신화적 분위기 속에 도덕적 성숙을 향해 가는 미국판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작중 ‘곰’은 단순한 물리적 존재로서의 동물을 넘어선, 원시적 생태가 그대로 살아 있는 광야 그 자체이며, 거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주인공 소년이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어떻게 무한과 영원으로 이끌어 가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들 유한한 삶의 경이로운 전환에 대한 더할 수 없는 응원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아프리카로부터 도입한 흑인 노예,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포함해 땅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곰이라는 야생의 동물로 상징화해 그려냈다. 소유욕으로 얼룩진 오욕의 역사, 그로 인해 벌어졌던 인종 차별, 싸움, 편견 등 모든 선조들의 죄악의 사슬을 끊기 위해 상속권을 포기하는 주인공 소년의 행동은 신화적인 행위로까지 격상된다.
「곰」은 윌리엄 포크너의 중·단편들 중에서도 단연 압권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미국의 제22대 계관시인인 다니엘 호프만은 이 작품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비유하며, “성인이 되어 숲을 찾은 소년이 사냥의 스승이었던 죽은 샘의 환영을 보며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장면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은, 미국 소설 역사상 가장 뭉클한 장면 중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소설은 전체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작이 열여섯에 사냥을 떠나는 1장을 시작으로, 아이작의 회상, 그가 태어나기 전의 과거사, 그가 노인이 된 후의 장면이 시간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이가 차면 숲으로 나가 사냥을 할 수 있기를 고대하던 백인 소년 아이작은 마침내 열 살이 되던 해, 드넓은 황야를 마주한다. 그곳은 소년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전설이 되어 있는 거대한 늙은 곰 ‘올드벤’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다. 시간이 태어나 시간이 되는 이 땅에서 아이작은 경험 많은 사냥꾼 샘 파더스를 만나 자연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겸허와 긍지의 가치를 배운다. 훌륭한 사냥꾼으로 성장해 나가는 아이작은 올드벤과 조우하기도 하지만,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존재를 함부로 쏘아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올드벤을 정복하기 위해 나선 또 다른 사냥꾼 분과 싸늘한 노란 눈의 사냥개 라이언이 등장한다.
그리고 수천 년 이어져온 숲의 평화와 전설은 깨지고야 만다. 열여섯 나이에 목도한 올드벤과 샘의 죽음을 통해 소년은 숲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스물하나, 할아버지 대로부터 이어져온 미국 역사의 오류를 지적하며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장면은 샘과 올드벤과 라이언이 죽고 거의 2년이 지나 홀로 숲을 찾은 아이작의 모습이다. 그는 숲을 걷다가 큰 뱀과 맞닥뜨린다. 온몸이 얼어붙는 원초적 공포를 경험한 후 아이작은 멀어져 가는 뱀을 향해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아이작은 탐욕의 삶을 영위한 친할아버지를 부정하고 뱀 혹은 샘으로 상징되는 자연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윌리엄 포크너는 유산을 부정한 후 남루한 삶을 이어가는 남부의 백인 아이작 매캐슬린이 아니라, 뿌리를 찾은 숭고한 순간의 인간 아이작의 모습으로 이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백인 소년 아이작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년이 광활한 숲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고, 최고의 사냥꾼 샘과 전설의 늙은 곰 올드벤을 만나 진정한 숲의 주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숲에서의 경험을 통해 소유와 권리에 대한 의미를 확인하며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백인 소년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포크너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흑인들의 내적 변화와 함께 남부 백인 사회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크 트웨인이 쓴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등장하는 미시시피 강이 그랬던 것처럼, 『곰』의 주요 무대인 거대한 숲 빅바텀은 문명에 의해 사라질 운명에 처한 장소인 동시에, 겸허와 긍지와 명예가 존재하던 시절의 인류의 고향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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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의 작품들 가운데 비평가들이 현대사회와 인종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가장 많이 접근하는 작품은 단편집 <모세여 내려가라와 다른 이야기들>에 게재된 연작들이다. 그중에서도 『곰』은 그 핵심을 이루는 이야기이다. 포크너의 초기 걸작들에서 보이는 형식적 실험이 엿보이는 유일한 단편이면서, 다른 장편들에 비해 서사 중심으로 쓰여 비교적 용이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지역 작가’ 내지 ‘남부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기도 하는 포크너를 그런 한계 속에 가두어버릴 수 없는 이유를 바로 이 작품 『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작가가 이야기의 초점을 흑인 문제에서 거대한 숲으로 옮겨 가며 남부의 죄의식을 남부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인류 전체의 것으로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포크너 스스로도 “작가란 자기가 익히 알고 있는 환경을 이용하여 일반적인 인간에 관해 쓸 뿐이다.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진실하고 비극적일 수 있으며, 북부나 남부를 지엽적으로 다뤄서는 승화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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