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실록 대하소설 『산하(山河)』
소설가 · 언론인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1979년 발표되었다. 작가는 일제 치하의 학병 체험과 한국전쟁, 4·19와 5·16 등 지난한 한국 현대사를 문필가로서 감당해왔다. 이병주에게 문학은 먼저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한 물음이고, 다음으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창작 방법의 문제였다. 이병주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란 말로 압축되는 기록자로서의 문학관을 갖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실록 소설은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실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으려는 방법으로서 소설을 의미한다.
이병주의 문학적 깊이는 인물들의 미시적 접근을 통해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가늠하면서 우리 현대사의 속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데 있다. 이병주는 시사성과 보고성 그리고 객관성으로서 이루어진 몇 개의 에피소드가 엮어내는 소설을 통해 소설의 영역을 좀 더 넓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병주의 소설은 사실과 허구의 복합 양식이고 실록 대하소설『산하』역시 이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종문은 자유당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 파동 때 가표에 찍어야 하는 것을 글자를 잘 몰라 부표에 찍는 바람에 사사오입이라는 억지 논리를 동원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식 소문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소문인즉 입 구(口)자가 있는 쪽에 찍으라는 지령을 받았지만 가(可)자에도 부(否)자에도 입 구(口)자가 들어있는 바람에 아무 데나 찍었다는 것이 하필 부(否)표를 던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은 오히려 이종문의 권세를 확실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붕을 불러 그런 못된 소문을 퍼뜨린 사람을 색출해 엄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경무대에서 이기붕을 불러 이종문에 대한 소문을 단속하라는 지시는 곧 대통령이 이종문에게 내린 무소불위의 마패나 다름없었다. ‘국회의원 2백 명은 못 믿어도 이종문은 믿는다’라느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 등등의 표현은 비록 구두(口頭)일망정 이승만의 신임장이나 다름없었다. 이종문에 대한 이승만의 이러한 신임은 곧바로 이종문의 세도로 이어졌다.
원래 이종문은 노름방에서 화투장이나 만지던 노름꾼이었다. 그 노름꾼이 해방되자 서울행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길에 올랐다. 그리고 성철주, 이동식 등과의 친분을 쌓으면서 국내 정세에 대한 지식을 귀동냥으로 얻어듣게 된다. 거기에서 그는 앞으로 이승만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하며 부자지간의 연을 맺는다. 이때부터 이종문은 이승만을 ‘아부지’라고 부르며 호가호위의 권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종문의 권세는 이기붕이 자유당의 실력자로 등장하고 그를 업은 이정재가 또 하나의 호가호위 세도가로 떠오르면서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이기붕이 자유당의 실력자로 등장하고 훗날 정치깡패로 처형당한 이정재가 정치 일선에 나서면서 자유당은 사실상 파국을 향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그리고 6·25 전란까지의 이승만은 그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고 그 신념에 비춰 부끄러운 데가 없었다. 반대파가 무슨 소릴 해도 그는 떳떳할 수가 있어서 언제나 당당했다. 그런데 6·25 전란을 겪는 동안 그는 뭔가 마음 한구석에 죄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완고한 그의 고집이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막기도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고이는 죄의식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죄의식이 또한 지위를 끝끝내 지켜야 하겠다는 집념을 낳게 되고 그 집념이 무리한 수단도 불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1960년은 종장이자 서장의 해다. 새로 닥쳐올 어떤 사태에 대한 본능적인 후각을 갖고 있던 이종문은 정초부터 막연한 불안감에 젖어 들곤 했다. 이종문이 마산의 3·15 의거를 맞은 것은 어느 퇴기가 경영하는 술집에서였다. 그리고 이어서 4·19를 맞고 4월 29일에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무너진다. 5·16 직후 혁명검찰부에 의해 고발되어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이종문은 2년 만에 사면으로 풀려 나왔으나 이미 그에겐 갈 곳도 없는 빈털터리였다. 한 때 같이 살았던 차진희가 경영하는 목욕탕의 관리인으로 살던 이종문은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 악화하여 병원으로 옮겨지고 거기에서 숨을 거둔다. 평생 어떤 종교도 갖지 않았던 이종문이었지만 장례식만은 기독교식으로 치렀다. 이승만 대통령이 믿었던 기독교를 죽어서라도 믿고 싶으니 기독교 신자로 묻어 달라는 유언 때문이었다.
기록이자 문학' 또는 `문학이자 기록'은 이병주 문학의 지향점이자 그의 소설을 일관하고 있는 작가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문학이자 기록인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부분은 실재했던 인물들이었다. 「산하」는 1945년 8월 15일부터 1960년 4월 19일 전까지 해방정국의 정치적 혼란상으로 시작하여 이승만 정권의 탄생과 몰락을 다룬 정치소설이자 정치 이면의 여러 층위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증언소설이다. 해방 후 격변기의 미군정 치하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노름꾼 이종문이 상경하여 마약과 토목 물류 등 사업으로 성공하고 배신과 모략의 와중에서 제1공화국 국회의원까지 되었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다.
알려졌듯이 경남 김해가 고향인 이종문은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입고 건설업계를 좌지우지하며 자유당 창원 국회의원을 지낸 한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고, 실존 인물을 그대로 등장시켜 당시 정치를 생생하게 서술한다. 작품에는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하여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장택상 이기붕 신승모 조봉암 조병옥 김두한 이범석 등등 수많은 실존 인물이 나온다. 또한 작가는 기록자의 소명과 신빙성을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각종 사료와 논평을 곁들여 엮는 형식을 취한다. 대하소설 「산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트루먼 스탈린 등 세계 지도자의 심리 상황과 판단을 제시하여 조선 해방과 이후 상황이 세계사적 질서의 재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어지는 이종문의 상경기는 수많은 정당의 출현과 노선투쟁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마치 해방 전후사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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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산하』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좌·우익의 권력 다툼과 이승만의 권력 쟁취 과정, 한국전쟁과 이후 각종 혼란상 등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제시하면서도 민족 장래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부분이다. 나아가 중도적 인물 이동식을 통해 당대를 적극적으로 증언하며 보고서 신문 기사 격문 정부 발표문 등의 실제 사료를 적절히 배치해 역사성과 사회성을 더하고 있다. 또한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보도연맹 학살사건·거창학살사건·방위군 사건·중석불사건·부산개헌 파동·부정선거 등 현대사의 어둡고 비극적인 사건을 드러내고 있다.
소설 말미는 이승만 정권 몰락 후 이종문이 5·16 직후 부정 축재와 선거 조작 등으로 2년 옥살이하고 나온 뒤 선거에 낙선하고 사업도 실패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회자하는 유명한 명구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로 대미를 맺는다.
이종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해방공간에서 자유당 정권을 거쳐 4·19에 이르기까지의 15년 현대사를 소설로 압축한 작가는「산하」의 대미를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누렇게 나락이 익어 있는 들 사이로 은빛으로 반짝이며 강이 흐르고 있었고, 멀리 갈수록 추상적인 담청색으로 되면서 산과 산은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아아, 이 산하! 이 땅에 생을 받은 사람이면 좋거나 나쁘거나 잘 났거나 못났거나 모두 이 산하로 화하는 것이다. 이미 이종문은 산하로 되어 버렸다. 살아있는 사람은 일단 산에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시심과 먼 곳에 있는 이동식의 가슴에 시를 닮은 구절이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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