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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정한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

by 언덕에서 2024. 5. 11.

 

 

김정한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

 

김정한(金廷漢. 1908∼1996)의 중편소설로 1969년 [월간문학]에 발표되었다. 구한말부터 해방 직후에 이르는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 진사댁의 가족사와 한민족의 수난사가 실감 나게 표현된 이 작품은 제6회 [한국문학상]을 수상작이다.   이름 없는 민중의 항거 정신을 뚜렷이 부각한 문제작의 하나인 이 소설은 일제하 민족적 저항 의식이 강했던 허 진사 가문의 며느리 가야 부인의 일대기이다. 그녀는 한 가문의 수난을 온몸으로 감당해 내는 인고의 표상이며, 불도에 귀의함으로써 굴절 많은 생애를 마감하는 한국적 여인상이다. 이 작품은 가야부인의 생애를 역사적 수난과 관련지어 전개해 나간 구성법을 보여 준다. 4대에 걸친 가족의 수난사가 가야부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손녀 분이의 가야부인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야 부인(옛날 가야국 자리인 김해가 안태본이라고 해서 가야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의 시조부 허 진사는 국권 피탈 직후 일제가 강제 수탈의 무마책으로 내준 합방 은사금을 거부하고 간도로 이주해 간다. 가야부인이 시집온 지 구 년째 되던 해에, 허 진사는 독립운동을 하다 서간도에서 유골로 돌아오고(이것은 일 년 전의 일이다), 손아래 시숙 밀양 양반은 3.1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의 총질에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동안에 다시금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녀는 가야 댁에서 가야 부인으로 칭호가 바뀌고, 어느덧 6남매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자부도 몇이나 거느린 버젓한 시어머니가 되었다.

 시어머니와 그녀는 전통적인 유교 집안인 허 진사댁에서 불교에 눈이 뜨게 되고 서간도에서 돌아간 허 진사의 제삿날에 가야 부인은 제사장을 보아 가지고 오는 길에 땅속에서 돌부처를 발견하게 된다. 이에 가야부인은 봉건적인 이념이 유교와 미륵신앙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시아버지 오봉 선생(오봉산 밑으로 온 다음부터 부른 호라고 한다)은 태평양전쟁이 고비에 다 다를 무렵 일제가 조작한 애국지사 박해 사건, 즉 한산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이에 가야 부인은 도움을 청하러 이와모도 참봉에게 찾아가게 되나 헛수고로 돌아간다. 오봉 선생은 갖은 옥고를 겪다가 출옥 후 타계한다.

 한편 일본에 건너가 대학을 다니던 막내아들은 학병을 피해 숨어다녀야 했고, 양딸 구실을 하던 옥이마저 전쟁 말기에 정신대로 끌려갈 뻔한다. 그러나 죽은 딸의 남편인 박 서방이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여자 정신대원으로 끄려 가게 된 종의 딸 옥이와 결혼하자 옥이는 정신대 징용을 면한다.

 한편, 친일 분자로 정신대 징용에 앞장섰던 이와모도 구장은 낭떠러지 밑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어 해방이 되고 일반인들은 해방 덕을 보지 못했다. 징용에 끌려간 자나 정신대로 끌려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불행하리라고 믿었던 이와모도 참봉의 집은 행운이 일어났다. 고등계 형사 간부로 있던 맏아들은 그동안 숨어다니더니 경찰 간부가 되었고 몇 해 뒤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6남매의 어머니로 며느리와 손자를 거느리게 된 가야 부인은 광복 후에도 기울어진 가세가 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막내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둔다.

소설가 김정한 ( 金廷漢 . 1908 ∼ 1996)

 

 이 작품은 생애의 폭이 넓고 깊었던 가야부인의 괴로운 과거와 의젓한 처신을 중심에 놓고 시댁인 허 진사댁의 가족들이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겪는 수난사를 그리고 있다. 또한 한국 종교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 작품으로 4대에 걸친 가족의 수난사에서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읽을 수 있다. 죽임을 당하는 이와모도 구장의 묘사에서 외세에 기생한 친일 세력들의 말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작가적 양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도경 형사였던 이와모도의 장남의 출세에서 비틀거리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 못한 현대사의 파행을 묘사하고 있다. 아무튼 이 작품은 가족의 수난과 이에 대응하는 가야부인과 오봉 선생의 인고, 지절, 초월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역사를 과거의 일로만 묻어 버리지 않고 현재와 긴밀한 관련을 맺어 보고자 했다.

 2. 전통적인 것, 토속적인 것을 강조했다.

 3. 독자의 기준을 도시의 지식층보다 농촌 출신의 청년들에게 두었다.

 4. 농촌 생활에 밀착된 순수한 우리말들을 되도록 많이 찾아 쓰려고 했다.

 

 

『수라도』 역시 그의 이와 같은 문학관을 잘 반영하면서도 인간의 정신적 궤적을 형상화하는 데 더 치중한다. 즉, 오봉 선생의 대쪽 같은 기상, 가야 부인의 인고 미덕과 효성, 불심 등 현실에 마주 선 인간의 초월적 풍모에 중점을 두고 있다.

민족의 수난사를 바라보고 직접 그 가운데 위치했던 가야 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수라도'(악귀 세계)를 헤치는 고통의 행로이다. 오봉 선생의 서릿발 같은 기상과 지절정신(志節精神)은 '송죽(松竹)'으로 대표되는 우리 전통 유학의 혼을 당당히 이었고, 가야 부인의 효성 역시 그러하다. 게다가 가야 부인은 종교적 초월의 세계로 발돋움하는 영적인 승리를 지향한다.

 가야 부인의 초월은 현실 도피가 아닌 극복이다. 그녀는 현실을 외면한 적이 없다. 가족을 위한 살신성인에 가까운 헌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자애로움, 그리고 불의한 세력에 고초를 받으며 옥고를 마다치 않는 시아버지 오봉 선생을 깍듯이 공경하여 목놓아 울 줄도 알았다.

 작가는 "역사를 과거의 일로서만 묻어 버리지 않고 현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보고 싶다." 했는데, 이러한 작가 정신은 외손녀 분이의 회상 속에서 가야 부인의 일생이 밝혀지는 구성으로 실천된다. 즉, 가야 부인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분이 세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포괄적 기록이며, 새 세대의 가치관에 의해서 걸러지며 동시에 의미가 부여되는 민족 모두의 기억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소설은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들에게 되새길 만한 가치를 가진 사건을 재현해서 보여 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