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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동리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

by 언덕에서 2024. 5. 1.

 

김동리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

 

 

김동리(金東里. 1913∼1995)의 단편소설로 1935년 작가의 나이 23세에 [중앙일보]에 당선된 데뷔작이다. 몰락한 양반의 행위를 통해 민족적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해학적인 표현으로 어두운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한국인의 모습을 시니컬하게 조소(彫塑)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작가의 따뜻한 동정이 스며 있는 작품이다.

 김동리는 한학자 고(故) 범부(凡父) 김기봉(金基鳳) 선생을 장형(長兄)으로 두고 대구 계명중학을 거쳐 서울 경신고보에서 수학했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白鷺)>가 입선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나, 35, 36년에 <화랑의 후예>, <산화>(山火) 등 두 편의 소설이 연이어 [조선중앙],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에 주력하게 됐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몰락한 양반층의 기형적 인간을 통해 당시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단편소설이 지니는 특징(단일한 주제, 단일한 구성, 통일된 효과 등)이 잘 드러난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김동리의 대표작이다.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숙부님께서 ‘조선의 심볼’이라는 황 진사를 나에게 인사시켰다. 거무스름한 두루마기에 얼굴이 누르퉁퉁한 황 진사는 나이가 육십 가량 되는 노인이다. 가을이 깊어 갈 즈음, 완장 어른(숙부)을 찾아온 황 진사는 ‘쇠똥 위에 개똥 눈 흙가루’를 약이라 우기며, 비굴하게 끼니를 해결하려 한다. 그 일이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는 그의 친구 책상을 팔아서 밥값을 해결하려고까지 한다. 이러한 황 진사는 몰락한 양반의 자손으로 과거에 대한 집착과 긍지를 결코 버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진사 행세를 한다. 그는 끼니를 때우기조차 힘들 만큼 가난하지만, 솔잎 한 줌과 낡은 주역책을 때 묻은 전대 속에 차고 다니며, 지략과 조화를 부려보고 싶어 한다.

 늘 눈에 괸 눈물에서 혈육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던 숙모님과 나는, 그의 중매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황 진사는 젊은 과부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인 즉 황후암 육대 직손이 어떻게 남의 가문에 출가했던 여자에게 장가를 드느냐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새해가 되어, 완장 어른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황 진사는 두루마기를 빨아 입은 위에 시커먼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한철 소식이 없고, 숙부님이 ‘대종교 사건’으로 연루되어 피검되었을 때, 길가에서 자기 조상도 모르고 지낸 옛 조상을 상고해 냈는데, 바로 화랑이라고 좋아하는 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지 두 달 후, 나는 숙모님과 함께 곰의 쓸개, 오리의 혀, 지렁이 오줌, 두꺼비 가름 등으로 만든 약을 온갖 불구자와 병신들에게 속이며 팔다가, 순사에게 잡혀 가면서도 점잖을 떠는 황 진사를 보게 된다.

 황 진사는 초조하고 경황이 없는 나를 붙들고 지극히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지극히 중대한 사실’이란 그가 근일 어느 서적을 뒤지다가 그의 윗대 조상이 신라 시대의 화랑이었음을 알았노라는 것이었다.

 

조선의 선비 모습

 

 이 소설에서 명문 집안의 후손이며 신라 화랑의 후예라고 자랑하는 황진사의 가벌의식은, 시대착오적이고 위선적이며 무기력한 그의 현실 모습과 선명하게 대비되어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거의 긍지만을 내세우는 가벌의식이, 나라를 병들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다는 작가 의식과, 나아가 전통에 대한 올바른 계승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처하는 보다 나은 방법이 모색 없이 가벌의식이라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힌 황진사를 통해, 현실 속에서의 올바른 삶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당시 조선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한 가지 강한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김동리 자신이 분명한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자이면서 왜 하필이면 등단 작품에서 황진사와 같은 인물(작가와 마찬가지로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자의 계열에 서 있으면서도 다분히 정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부각했느냐 하는 점이다. 

 

 

 작가는 이처럼 보수주의자이면서도 다분히 정도를 벗어나 있는 인물을 등장시켜 풍자와 연민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전통의 가치 있는 계승을 희구하는 자신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듯하다. 작가는 한국의 전통적 정신을 이끌어 온 두 개의 축, 즉 무교와 유교 가운데에서 후자보다는 전자 쪽에 더 강하게 끌리는 작품을 일관되게 써왔다. <무녀도>, <바위> 등의 작품을 읽으면, 이 시기의 김동리가 무교적 세계에 대하여 얼마만 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유교적 세계를 적극적으로 부각한 작품은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국가 상실로 인하여 공식 문화로서의 유교가 커다란 타격을 입은 반면, 비공식 문화를 대표하고 있던 무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지속력을 보여 주고 있었던 당대의 상황을 감안할 때 작가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다. 철저한 유생임을 표방하는 황진사가 그 명분과 실제의 괴리로 비판(비록 연민 섞인 비판이기는 하지만) 되고 있음도 의외가 아니다.